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틸킴 Aug 08. 2016

06. 오그라들면 어때

<여기와 거기>, 장우철

글에 앞서 당신은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뉠지에 대해서.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참 당신다운 책을 냈구나, 할 것이고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싫어할 수도 있겠다고
그래준다면 더욱 좋겠다고.

책을 열 때 나는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남은 페이지가 넘긴 페이지의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았을  땐
당신을 알 것도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그마저도 남지 않았을 때엔
당신이 궁금해졌어요.
짧은 책이다, 아쉬웠어요.

처음에 나는 당신이 지나치게 멋을 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보그와 지큐는 얼마나 가까운가요,
당신 이름 앞에 붙은 에디터라는 태그가
당신이 쓰지 않은 말들을 읽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사랑을 노래하는 인터뷰이에게 이렇게 물을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세상에 사랑이 한 번 뿐이라도 그랬을까요?

-<여기와 거기> 중


으름 알 속에 스민 계절을 맛볼 줄 아는 사람이었고요.


먹기에 좋진 않으니
그건 으름의 안간힘
원으로 먹을 갈다 말고 으름 두 개를 눌러보았다.
너의 1년이었니?

-<여기와 거기> 중


이런 문장을 읽을 땐 너무 좋아서 한숨이 나오더군요.

그래요, 모든 건 갑자기 오는 법이죠.


안녕, 매일 보던 것들. 후박나무, 목련, 노간주나무, 여관 불빛, 교회 십자가. 앞집 마당에서 중학생이 줄넘기를 하고 있는데 지금이 12월이라는 생각에 그만 뭉클하고 말았다. 그렇지, 모든 건 갑자기 오지. 준비를 다 하고 나서야 오는 건 없지. 그러다 어느새 목련이 피고 지겠지. 부산에 다녀왔군. 모든 걸 잊을 순 없어. 읽다 만 책을 다시 읽을 수는 있겠지만.

-<여기와 거기> 중

외래어의 힘을 쉽게 믿지 않는 건, 시에 남은 미련 때문일까요?
깨끗하게 발라놓은 단어들엔
잘난 척하는 고유명사도 얼마 없었지요.
그렇게 남은 문장들은 단정하고 반듯했습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당신이 책을 내도 되겠단 결심을 한 덕분으로
나는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솔직히 부러워한 적이 없었어요.
보통은 질투를 했죠.
멋있어 보이고 싶단 생각을  한적도 별로 없어요.
없어 보이니까요.

그래서 내 눈에 너무나 멋있어 보이는 누군가가 있어도
그 누군가를 부럽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멋을 부리는 건 허세를 떠는 일이고,
그건 유치한 일이니까.

오그라든단 말을 듣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어요.
그 말은 내 재주 없음을 강조하는 따옴표 같았거든요.

그게 천구백칠십 몇 년 서울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은 떠올릴 때마다 뻐근했다. 유행의 갈래였다면 어떻게든 비슷한 무엇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오지 않았고, 여태 진공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누가 더 미쳤는지를 친구들과 떠드는 정도? 언제고 우리는 서로 말했다. "다 있었어, 벌써 다 있었어."

-<여기와 거기> 중


하지만 김추자의 노래를 들으며, 다 있었어, 벌써 다 있었어
호들갑을 떠는 당신은 얼마나 솔직했던가요.
멋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오래도록 탐구하고
그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들을 해내는 당신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오그라드는 거,
그게 뭐가 나빠.

이런 날 네모진 카스텔라를 포크로 갈라 한 입 넣는 유순한 만족이라니, 
적절 하달 수밖에 없는 일이다.


긴자 규쿄도 2층에서 벼루를 고른다. 쓰다듬기도 톡톡 두드리기도 하는 것은 
딱히 고르는 요령을 알아서는 아니다. 그냥 한번 그래 보는 일.

 -<여기와 거기> 중

분초를 자기의 모양대로 살아가는 일이란 사실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당신의 인터뷰이는 말했습니다.
대상 앞에 존재감을 갖고 서야 한다고.

받아들이는 매 순간 접점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어느 날 자기도 소비된 시대의 찌꺼기에 불과한 거야 (권부문 작가 인터뷰)

-<여기와 거기> 중


읽다 보니 당신의 왕성한 소화력이  부러웠습니다.

좋은 것만 먹어서 소화력이 좋은 걸까요?
그렇다면 좋은 것만 골라 먹을 줄 아는 눈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어쨌거나 당신이 지은 글을 입에 넣어본 덕분입니다.  
국어교사 어머니나, 경영가 아버지나, 대학을 나온 부모 밑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나와 나를 비교하는 일,
이런 거 더 이상 안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은요.

솔직하게 부러워하고, 멋 부리고 싶은 대로 멋 부릴 겁니다.
어떤 것들은 허세로 판명이 나고, 어떤 것들은 약점이 되기도 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지은 매듭들의 중심엔 내가 있을 테니 괜찮아요.

비 오고 눈 오고 날이 흐리면, 왠지 일상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보여요. 모든 사람이 옳다 그러는데, 봐 아니잖아 하늘이 증명하는 날 같아요. 하늘은 푸른 게 좋은 거야, 하던 사람들이 날이 흐려지면 뭔가 망쳤다는 표정을 짓는데, 저는 그 거봐 이런 날이 있단 말이야 얘기하고 싶죠. (권부문 작가 인터뷰)


내가 좋은 칼 되려면, 좋은 숫돌 옆에 있기만 하면 됩니까? 좋은 칼 안되잖아요. 벼려야 하는 건 자기인 거야. 가만있는 놈들보다 훨씬 힘들지. 벼르려면 엄격해야 하죠. 좋은 숯돌은 결국 닳아 없어져야 하죠. ~ 혼자 해야 해요. 그걸 하면 한 20년 지나면, 제 나이보다 훨씬 빨리 집단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거기서 자기 발견이 시작되는 거 아닌가, 생각해요. (권부문 작가 인터뷰)

-<여기와 거기> 중
       

이런 글을 보기 전의 나와 
본 후의 내가 같은 사람일 순 없는 거잖아요.

거기 있는 당신이
여기 있는 나를 움직였습니다.
거기와 여기 사이

물리적인 작용은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1. 오그라드는 걸 지나치게 싫어하는 사람들

2. 잡지 에디터들은 다 보그체만 쓸 것 같다는 분들

3. 장우철 에디터의 사생활이 궁금한 분들

4. 그냥 좋은 에세이 읽고 싶은 사람

매거진의 이전글 05. 더워죽겠는 지금,   당신에게 눈의 나라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