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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Aug 06. 2016

05. 더워죽겠는 지금,   당신에게 눈의 나라를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자 눈의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새하얘졌다

- <설국> 중

덥습니다, 이러다 죽겠다 싶을 만큼 덥습니다.
밤새 뒤척이는 이유가 사랑 때문이면 낭만적이기라도 할 것을,
도무지 더운 기운을 날리지 못하는 선풍기의 '강풍'을 과연 강풍이라 불러도 괜찮은 걸까 의심하는 여름밤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덥습니다.


광화문 세종대왕이 41도까지 올라간 여름 햇볕에 땀 흘리고 계시다는 이런 날,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자 눈의 나라라는 저 문장은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아니, 눈이라고? 지금 스노우 말입니까?


언제 눈 내리는 날이 있었나 싶은 지금이 바로 <설국>을 읽을 때입니다.



이 지방은 나뭇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쌀쌀하고 찌푸린 날이 계속된다.
눈 내릴 징조이다. 멀고 가까운 높은 산들이 하얗게 변한다. 이를 <산돌림>이라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은 바다가 울리고, 산 깊은 곳은 산이 울린다. 먼 천둥 같다.
이를 <몸 울림>이라 한다. 산돌림을 보고 몸 울림을 들으면서 눈이 가까웠음을 안다. 

- <설국> 중


푹푹 찌는 이 한반도에서, <설국>으로 가기 위해선 비행기를 탈 필요가 없습니다.

터널을 지나는 기차에 몸을 실을 필요도 없습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다른 세계가 이미 시작되니까요.

이곳은 산이 울리고 바다가 웅웅 거리는 세계입니다.

눈이 곧 쏟아지면 기차는 끊어지고, 쌓인 눈 속에 묻히면 현실과는 완전히 단절될 겁니다.
다시 책을 덮기까지 몇 시간 동안은 말입니다.


문장들의 울림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텐가 하는 심상치 않은 느낌이 시작될 겁니다.
옷을 네 벌이나 껴입은 역장에게 요코라는 아가씨가 급히 말을 거는 순간.
성에 낀 차창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를 시마무라와 함께 보는 순간.
가와바타의 안내에 몸을 맡기며, 멀리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새하얘지는 산봉우리들 앞에 서는 순간.






눈과 비는 과연 같은 것에서 시작된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성질이 다릅니다.

눈은 빗물이 언 것뿐인데 이전의 기억은 다 까먹은 것처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버리죠.


비는 요란하게 내려 뭐든 속시원히 쓸어가 버리지만

눈은 소리도 없이 내려서 어느 순간 지붕을 무너뜨리고 오도 가도 못하게 덮어버립니다.
근데 또 녹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려요.

그럴 거면 왜 그렇게 많이 내려서 고생을 시켰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죠.
아, 이 범지구적인 헛수고.


"감상 따윈 쓰지 않아요."
"그런 걸 기록해 놓은 들 무슨 소용이 있나."
"소용없죠."
"헛수고야."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눈이 울릴 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겐 결코 헛수고일 리가 없다는 것을 그가 알면서도 아예 헛수고라고 못 박아 버리자, 뭔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 <설국> 중

<설국>은 눈에 관한 소설이자, 헛수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내와 자식이 있는 남자가, 이혼할 마음도, 새 여자를 가질 마음도 없이
원래 살고 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매력의 두 여자에게 끌리는 이야기.
남자가 느끼는 매혹은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지근하고, 그 마음과 행동은 결과를 갖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몇 번씩이나 눈의 고장에 찾아오는 건 헛수고라는 겁니다.

고마코를 만나면 댓바람에 헛수고라고 한방 먹일 생각을 하니,
새삼 시마무라에겐 어쩐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 <설국> 중

이 한가한 불륜남의 이야기가 이토록 아름다운 건,

그것이 헛수고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혀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 하는 일에 느끼는 씁쓸한 즐거움 -

우리의 몸에는 허무에 대한 DNA가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에겐 죽음이 예정되어 있고
사랑의 계획엔 시작과 동시에 이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한숨 쉬고 눈물짓게 되는 건 이런 우리들의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건 일회성이라는 우리들의 가장 강력한 장점이기도 해서 아름다워요.
붙잡을 수 없음을 자각하는 순간 더 애틋해지는 끝난 사랑처럼.






"사람은 참 허약한 존재예요. 머리부터 뼈까지 완전히 와싹 뭉개져있었대요.

곰은 훨씬 더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도 몸에 전혀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데."
 ~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을 진 산을 바라보노라니, 감상적이 되어 시마무라는 사람의 살결이 그리워졌다.

- <설국> 중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곰과 인간의 관능이 얼마나 다를까에 대해 썼지만

저는 <설국> 시절의 사랑과 오늘날의 사랑이 곰과 인간의 차이만큼 크다고 느꼈습니다.


라디오에서 PX가 Post eXchange의 약자였단 말을 들었는데요,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던 곳이 매점이 되었구나,
소식은 이제 간식이 된 거구나, 라는 생각에 재미있는 사연이다 싶었어요.


우리는 좀처럼 고독을 모릅니다.
항상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카톡 메시지들이
카드회사에선 문자들이
직장에선 이런저런 독촉 전화들이
각종 사이트 메인엔 세계 곳곳의 이야기가
너무나 쉽게 다른 세상과 연결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고독이 무서워요.

잘 모르니까.

애인과 연락이 잘 안 되면 반나절을 지나기도 전에 두려워지고

폰이 울리지 않으면 모두 다 날 잊은 건 아닌가 쉽게 슬퍼집니다.

그저 스마트폰을 켜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정말로 거기 있는지,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너무나 쉽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겁니다.


손님은 대개 여행객들이죠. 전 아직 어리지만 여러 사람들 이야길 들어봐도, 마냥 좋아서 그땐 좋아한다는 말도 못 한 사람이 늘 그리워져요. 못 잊는 거죠. 헤어진 후엔 그런가 봐요. 상대편에서도 기억해주고 편지를 보내는 이는 대체로 그런 말들을 해요

- <설국> 중

이젠, 기술적으로 누군가와 연락될 수 없는 시간이란 없습니다.

편지를 한번 띄우고 나면 닷새가 지나고, 다시 답장을 받기까지 또 닷새가 걸리는 시절처럼
누군가의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볼 시간이 전혀 없어요.
저는 답장에 안달 난 사람처럼 지워지지 않는 1을 보고, 달리지 않는 댓글에 조바심을 냅니다.


통신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인간의 사랑은 어쩌면 퇴화한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 수 있는 말을 언제든 다 할 수 있다는 건 사랑의 관점에선 퇴화 아닐까.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관계는 1년에 한 번 이어집니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나?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 그전에 그 사람이 있었나? 싶을 만큼 비현실적인 시차

2016년의 저로서는 엄두가 안 나는 일이죠.



쓰고 보니, 여름에 어울리는 속 시원한 소설은 아닌 것 같네요,
그래도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전혀 다른 시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새하얀 눈 위에 색바래기를 하는 옷감들처럼 서걱거리는 인견 위에 누워

옛날의 사랑에 대해 읽어보는 건 어때요?
스마트폰을 꺼서든, 알람을 꺼서든 잠시 잠깐 설국에 고립된 것처럼,
별다른 결론 없이 끝날 이 서늘한 사랑을.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1. 누구 하나 옷을 벗지 않아도 침이 꼴깍 넘어갈 듯 야한 소설을 읽고 싶은 사람

(마지막으로, 지금 연습 중인 걸로 하겠다고 악보를 봐가며 신곡 우라시마를 켜고 나서 고마코는 말없이 발목을 샤미센 줄 밑에 끼우더니 자세를 흐트렸다. (꼴깍!) 갑자기 요염함이 흘러넘쳤다.) 

2. 더워 죽겠는 사람

3. 애인이 오래도록 답장을 씹어 화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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