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 개봉했던 영화 '꾸뻬씨의 행복여행'을 보았다.
몸은 얼마든지 어른으로, 어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정작 마음이 어른이 되지 않았을 때, 즉 몸과 마음이 모두 어른이 되지 않았을 때,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를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았다.
모습이 어른이니까 당연히 어떤 '어른스러움'을 기대했으나,
완전히 미숙하고, 감정적이고, 환상에 빠져있는,
현실에 전혀 발을 붙이고 있지 못하는 어떤 존재를 만났을 때의 기분이란...
영화 속에서 그 최대 피해자는 중국에서 만났던 여자, 잉리였던 것 같다.
(클라라는 헥터와 동급인 것 같아서 패스!)
어른이라면 누구나 그 맥락을 안다.
클럽에서 만나 호텔까지 따라온 여자.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보는, 혹은 보지 않는 그 시선이 의미하는 것.
잉리가 기대하는 것, 잉리의 포주가 기대하는 것.
오직 헥터만 모른다.
그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순수하게 사랑했는데, 오히려 잉리가 자기를 속이고 상처주었다고 생각한다.
(첫 여행을 떠나자마자 애인 두고 다른 여자한테 홀딱 빠져버리는 한심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하는 헥터의 원망어린 투정에 실소가 나온다.
어른이 되지 못한 걸로 치면,
나 또한 헥터 버금가는 사람이었다.
흔히 '피터팬 콤플렉스'라고 불리는, 어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 병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현실적이다'라는 말을 모욕적인 단어처럼 생각하며 살아왔다.
현실적이다 = 세속적이다 = 타락했다, 이렇게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세상과 타협하는 일이고, 솔직히 그건 엄청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꼰대들이 나를 내려다보면서 애송이를 대하듯이, "너도 겪어 봐, 그럼 알게 될 거야."하는 말투가 싫었다.
내가 뭔가 대단한 거라도 놓치고 있다는 듯이, 그걸 모르면 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별로 잘난 것도 없어 보이는 어른들이 나를 무시하는 그 말들이 싫었다.
"넌 아무것도 몰라."
이 말을 인정하기가 죽도록 싫었다.
그래서 한때 꽤나 경험 많은 사람인양 나 자신을 포장하기도 했고,
내가 아는 것들을 그럴싸하게 떠벌리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어쩔 수 없이 진짜 어른이 느끼는 감정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서,
드디어 할 말이 없어졌다.
내가 여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뭣도 모르고 떠들어댔던 나의 흑역사에 대한 기억에 이불킥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며 2014년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여행하는 헥터를 둘러싼 진짜 어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성장을 돕는, 그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진짜 어른들은 대체로 다정하고 온화하다.
그들은 행복이 뭔지 알고 싶다며 세계를 떠도는 철없는 그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돕고, 그가 내미는 도움도 기꺼이 받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직접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다.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이제 와서 깨닫는 거지만,
나에게 어리고 미숙하다며, 아무것도 모른다며 무시하고 잘난 척 했던 그 어른들이,
참 어른, 진짜 어른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진짜 어른은 자기가 지나왔던 길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기는 더이상 미숙한 어린 애가 아니라며, 뻐기지도 않는다.
모두가 가야 하는 그 길,
성숙으로 가는 그 길을 지금 지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군다.
왜? 아니까.
진짜 안다는 건 이런 것이다.
알면 겸손해지고, 알면 이해하게 된다.
알면 듣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Listening is Loving'이라고 했나보다.
영화 포스터가 묻는다.
"당신에게 행복은 무엇입니까?"
2021년 현재, 나에게 있어 행복이란... 아마도 '제대로 아는 것'이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