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에 이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땐,
월터 할아버지의 완벽한 희생에 감동 받아, 옷 앞섶이 다 젖을 정도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츤데레'의 정석을 보여주는,
그 투박하고 무뚝뚝함 속에 느껴지는 다정함과 따뜻함, 그리고 외로움에 한없이 한없이 울었었다.
그러나 이번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몽족 갱들이 있는 한, 타오와 수가 맘편히 살 수 없다는 건 팩트다.
그들이 달리 취할 방법이 없어 무력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가슴 아프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도 어디에선가 타오와 수와 비슷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이들에겐,
안타깝게도 월터 같이 대신 죽어줘서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줄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월터의 방식은 일종의 판타지에 불과하며,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월터에겐 베트남에서 어린 소년병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 늘 따라다닌다.
그 죄책감을 타오를 살리는 것으로 대신 갚으려고 한다.
숭고한 희생이지만, 그런다고 타오의 삶에서 영영 위험이 제거되진 않는다.
월터 코왈스키는 총과 폭력, 욕으로밖엔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슬픈 남자다.
그러니 결국 그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고,
월터의 직접적인 폭력이 가해지자,
가끔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놀리고 때리는 재미 정도였던 타오 괴롭히기가,
타오네 집에 총질하기, 수 폭행하기로 강도가 몇 배로 세져서 돌아왔다.
폭력과 복수는 그 어떤 경우에도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젊은 신부라면 이 문제를 결국 어떻게 해결했을까 궁금해졌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맘 같아서는 싹 다 총질해서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들 수 있지만,
그래서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타고, 데이지를 옆에 앉혀서 드라이브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몽족 갱들은 언젠가 다시 출소할 것이고, 그 오랜 원한에 타오가 어찌될 진 장담할 수 없다.
몽족 갱들이 아니더라도, 현실에선 다른 갱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폭력은 답이 아니다.
계속 그 말만 떠오른다.
또 한 편으로는 몽족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청소년 시절의 아이들은 자신이 딱히 뭘 할 수 있을지 잘 모른다.
그건 몽족 갱들이나 타오나 동일하다.
아는 것도 없고, 돈도 없고, 미숙하고, 불안한 시간들...
그럴 때 가장 위안이 되는 것은 자기와 비슷한 친구들이다.
같이 몰려다니면서 혼자 있을 때는 감히 누리지 못했던 힘을 경험하고, 세를 키워나가면서 도취에 빠진다.
그럴 때 가장 위험한 대상은, 나랑 비슷한데 나같이 살지 않고 있는 존재다.
그런 누군가를 보면, '내가 혹시 뭘 잘못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이 들기 때문이다.
몽족 갱들이 타오를 그토록 자기네 갱에 들이려고 하는 게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
눈에 자꾸 거슬리는 요소를 나와 똑같이 만들어버리고 싶은 것.
타오에겐 몽족 갱들에게 없는 게 있기 때문이다.
구박은 할 지언정, 그를 아끼고 그가 옳지 않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단단히 잡아주는 가족.
또 역시나 구박은 할 지언정, 그에게 일을 가르치고, 사회 속에서 어울릴 수 있게 가르쳐주는 월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오에게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근성이 있다.
몽족 갱들이 보기에 타오는 별 것도 아닌 주제에 자기들에 비해 가진 게 너무 많은 녀석이다.
그래서 밉고, 그래서 망가뜨리고 싶어진다.
월터는 월터 나름대로 최선을,
몽족 갱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최선을,
타오는 타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삶을 지켜갈 뿐이다.
그래서 이 삶은 슬프고도 놀랍다.
각자의 매 순간의 선택들이 얽히고 섥혀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