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고등학교 시절, 지금의 당신 삶을 바꿀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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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민학교, 중학교 내내 항상 최우수 학생이었다.
반 1등은 놓친 적이 없고, 전교에서도 늘 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서 왔다갔다 했었다.
그랬던 내가 외고에 들어가면서, 반에서 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원인은 선행학습의 부재였다.
나야말로 강북에서 학교 공부만 충실히 하던 학생의 전형이었고,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도 솔직히 고등학교 가서 처음 봤다.
고등학교 오면 이런 책도 보는 구나... 하고 신기해 했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이미 그 책을 기본 정석은 물론이요, 실력 정석까지 두 번씩 다 떼고 온 상태였다.
수학이라면 나름 자신 있어서,
중학교 때엔 선생님이 일이 있으시면, 내가 애들을 대신 가르치기도 할 정도였는데...
고등학교에 오면서 수학을 전혀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고등학교 1학년 내내 수학 선생님을 연모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상상해본다.
만약 내가 고등학교 때도 반 1등, 전교 5등 이내의 석차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이런 기분들을 죽을 때까지 몰랐을 것이다.
-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기분,
- 분명히 내가 교실에 존재하는데, 아무도 나를 인지하지 못하는, 마치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
- 한 학기가 지나도록 선생님이 내 이름을 기억 못해서 계속 번호로만 불리는 비참한 기분,
- 석차 순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부당하다는 기분,
- 공부를 못 하면 다른 것으로라도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뭐라도 해보려는(ex.회계 맡기) 절실한 기분,
-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발버둥치는(ex.만화클럽 만들기, 춤 클럽 만들기...) 기분,
- 그냥 확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싸우는 기분...
이런 기분들을 전혀 모르는 대신,
- 내가 공부를 잘하는 걸 계속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 친구들이 공부를 못하는 걸 계속 의아하게(라고 쓰고 '이상하게' 라고 읽는다) 여겼을 것이다.
- 내가 최고의 학벌을 갖고 멋진 인생을 누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다 내 노력 때문이라고, 다 내가 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 살아가다가 조금이라도 난관에 부딪혔을 때, 말 그대로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멘탈 붕괴를 경험했을 것이다.
- 만에 하나 1등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까봐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면서, 날 치고 올라오려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경계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계속 공부를 잘 했더라면...
물론 그것도 좋았겠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 순간에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됐던 고등학교 때의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참 중요한 분기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때 그 비참한 기분 속에서도 어떻게든, 뭐라도 해서, 다시 존재감을 되찾으려 분투했던,
여고생 민영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