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주인공 성별을 바꿔보라. 그리고 바뀐 성별에 맞게 영화의
줄거리를 재구성하라.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하긴 어렵지만, 이번 주제를 보고 바로 떠오른 영화는 바로 이거였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이야기를 가지고, 그 집에 사는 가상의 하녀 메리 라일리의 시점에서 다시 상상의 나래를 편 소설인데, 영화에서는 줄리아 로버트가 창백한 얼굴의 조용한 하녀, '메리 라일리'로 분했고, 지킬 박사 & 하이드의 1인 2역을 존 말코비치가 맡았다. (참고로 나는 오랫동안 존 말코비치의 광팬이었다. 그의 영화 속 목소리가 내 핸드폰 컬러링이었을 정도! ^^)
영화 속에서 메리 라일리는 지독하게 어둡고 그늘진 인물로 나오는데,
그녀는 남모르게 조용히 지킬박사를 연모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보여준 친절한 관심이 고마운 것.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하이드라는 괴물 같은 남자가 나타나, 메리 라일리에게 저돌적으로 접근한다.
처음엔 무서워하고 경계하던 메리는, 점점 더 하이드에게 빠져드는 자신이 혼란스러워지고,
급기야 지킬 박사 = 하이드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 둘을 모두 사랑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조악한 CG 때문에 보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두 배우의 연기나 이야기의 미묘함은 언제나 나를 매혹시키곤 한다.
그런데 이걸 성별을 바꿔보라고?
하아...
그럼, 지킬 박사가 여자가 되야 한다는 소린데,
이 영화의 배경 당시의 사회적 관념으로는 여자가 박사가 되기는 매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그냥 평범한 일반 여성으로 해야 하는데...
남편이 있는 가정 주부(마님)로 하자니, 이야기 장르가 바뀔 것 같고,
그렇다고 싱글 여성으로 하자니, 집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어야 이게 가능할까 고민이 된다.
음... 그냥 상상만 해보라는 건데, 나는 지금 어떻게든 그 당시 현실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하려고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구나, 지금?
그냥 지킬 박사가 여자라고 치자.
그리고 그 집에 '마크 라일리'라는 남자 하인이 있다고 하자.
그는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면서 자신의 박사 아가씨를 연모하는 중인데,
어느 날 지적이고 고상하던 지킬 아가씨에게 하이드라는 여자 친구가 방문한다.
(둘은 절대 동시에 있지 않는다)
그런데 지킬 아가씨와 달리 하이드라는 이 여자는 마크를 적극적으로 유혹하려 든다.
그뿐만 아니라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런저런 사고를 일으켜 마크를 힘들게 만든다.
그래서 이 하이드 아가씨 때문에 얌전하고 조용한 남자, 마크의 일상이 대혼돈의 상태에 접어든다.
그러던 어느 날, 지킬 아가씨가 다급한 모습으로 마크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마크는 지킬 아가씨와 하이드 아가씨가 동일 인물이며, 하이드가 지킬의 존재를 삼켜버리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크는 지킬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한때 완전히 매혹되었던 하이드를 제 손으로 죽인다.
어라?
메리 라일리의 줄거리를 성별만 바꿔서 그대로 써나가다 보니,
결말이 확 바뀌어버리네?
영화 '메리 라일리'에서는 지킬이 직접 하이드를 죽이고, 메리는 그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기만 하다가,
하이드가 죽은 후에, 그의 시체 옆에 나란히 누워서 그를 쓰다듬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그런데 성별을 바꾸니까, 마크가 하이드를 지킬 대신 죽여버리게 되네?
무의식적으로 썼지만, 써놓고 나니 좀 무섭다.
남자는 여자를 쉽게 죽일 수 있지만, 여자는 남자를 차마 죽이지 못할 거라는 편견이 나에게 있나보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영화와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내가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다시 잘 생각해봐야겠다.
내가 과연 어떤 지점에서 이 이야기들에 매료되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