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첫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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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전체에서의 '첫' 싸움을 말하는 거라면,
갓난아기 시절로까지 거슬러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지도 않을 뿐더러,
아기가 기껏해야 젖 달라고 울기나 했겠지, 힘 없어서 누구랑 무슨 싸움이 됐겠나 싶다.
그렇다면 동등한 관계에서의 싸움을 찾아봐야 하는 건데, 그건 역시 친구들과의 갈등이겠지...
싸움이랄 것까진 없었지만,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긴 하다.
국민학교 1학년(아니면 저학년 어느 때쯤) 때였던 것 같은데,
우리 반의 김OO이라는 남자애의 생일 파티에 초대되서 갔던 기억이 난다.
김OO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공부도 곧잘 하는 편이었고,
그 나이 또래의 다른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꽤나 젠틀한 편이었다.
일단 옷 입고 다니는 것이 깔끔했고, (셔츠에 나비넥타이 같은 느낌)
곱상하게 생겼고,
하여튼 그 시절 꾸러기들과는 결이 다른,
범생이에, 패셔니스타에, 젠틀남, 그런 이미지였다.
남자 아이 생일 파티에 초대되어 간다는 것이 꽤나 설렜던지,
나는 선물을 매우 고심해서 골랐었는데,
김OO에게 어울릴 만한 패션 양말을 사서, 정성껏 포장해서 가져갔었다.
어디 가서 뭘 먹고 했는지까지는 자세히 기억이 안 나고,
그애의 선물 개봉식 장면이 떠오른다.
모든 애들이 김OO을 둘러쌌고, 김OO은 하나씩 선물을 개봉했다.
그 애가 내 선물 포장지를 쭉 찢더니,
내용물이 양말인 것을 확인하고는,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잔뜩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며, "애걔, 양말이네." 라고 했던 것 같다.
그 순간 얼마나 무안하고, 창피했던지...
그것이 그 날의 1차 충격이었다.
보통 선물을 받으면, 딱히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일단은 준 사람을 생각해서 '고맙다' 정도는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김OO의 그런 태도는 정말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들끼리 바둑판을 꺼내놓고 돌아가며 오목을 두고 있었는데,
김OO과 내가 한 판을 두게 되었다.
김OO은 자기 집에서 자기 바둑판으로 하니까, 당연히 자기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이길 것이 거의 확실시되자,
신경질을 부리며 "에이씨~" 하더니, 손으로 바둑돌을 다 흐트러버렸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김OO의 그 무례함과 옹졸함과 유치함이 너무나 큰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결국 나는 그 파티에서 일찌감치 나와버렸다.
집으로 오는 길에 생각했다.
생일 당사자니까 내가 져줬어야 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오목에 그런 룰 같은 건 없다.
게임은 게임일 뿐, 오목 한 판 졌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승부에 목을 걸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놀이의 일부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김OO과 싸웠냐고?
아니, 싸움은 관계 회복을 원하는 사람과 하는 거다.
싸움하는 수고를 들여서까지 더 잘 지내고 싶은 사람과 하는 거다.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과는 싸움도 하지 않는다.
그냥 멀어질 뿐이다.
내가 아는 사람 리스트에서 조용히 삭제할 뿐.
그날 이후로 김OO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삭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