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에 나를 비춰보다" - (28) 한 입만

by 마하쌤

"그림책에 나를 비춰보다" - (28) 한 입만



"한 입만!"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밤에 먹는 라면이 생각난다.


야식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누군가 라면을 끓였을 때,

나는 젓가락을 들고 슬그머니 그 옆에 다가가 말한다.

"한 입만!"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밤에 라면 하나를 다 먹으면 몸에도 안 좋고, 다음날 아침에 얼굴이 붓기 때문에 딱 한 입만 먹기 위해서다.

2) 내가 직접 라면을 끓이는 건 너무 번거로운 일이라서, 누가 대신 수고한 것에서 살짝만 얻어먹고 싶어서다.

3) 원래 그렇게 한 입만 뺏아먹는 게 제일 맛있기 때문이다. (많이 먹을까봐 초긴장하는 모습 보는 것도 재밌고)


=> 즉, 라면을 먹고 싶은 나의 욕구를 채우면서도, 얼굴이 붓지 않고, 직접 끓이는 수고도 안 할 수 있으며,

뺏아먹는 재미까지 누리면서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한 입만!"인 것이다.

나로서는 모든 면에서 다 이득이 되기 때문에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모든 게 달라진다.


나는 야밤에 갑자기 라면이 미친듯이 먹고 싶다.

그 간절한 욕망은 가스불을 켜고, 물을 받아서 끓이고, 라면이 다을 때까지 지키고 서 있는 노력을 감수하게 한다. 나의 온전한 욕구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을 마음껏 누리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 젓가락을 들고 옆에 다가와 말한다.

"한 입만!"


그 얘길 듣자마자 "먹고 싶으면 너도 끓여 먹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내 심정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이 라면을 혼자서 다 먹고 싶다. 면빨 하나, 국물 한 방울까지 내가 다 먹고 싶다. 왜? 내가 끓인 거니까!

2) 끓이는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은 주제에, 거저 얻어 먹으려고 하는 저 고약한 심보가 얄밉다.

3) 말은 "한 입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한 입으로 끝나는 경우도 별로 없거니와, 설령 정말 한 입만 먹더라도

젓가락에 면을 칭칭 감아서 반 이상을 한 입에 먹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한 입을 허용했다가 다 뺏길까봐 무

섭다.

4) 하지만 안 된다고 하면,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째째하게, 쪼잔하게 군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신경 쓰인다.

5) 뭐든 사이좋게 나눠먹는 게 훌륭한 거라는 얘길 하도 들어서, 너무 욕심을 부리는 내가 나쁜 건 아닐까 싶다.


=> 나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원한 것이 딱 "한 입"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한 입을 원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걸 거절하면 내가 쫌생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젠장! 뭐가 이래! 왜 내가 수고한 걸 뺏기면서도 쫌생이 소리까지 들어야 하지?

"한 입만!", 이건 정말이지 너무나 사악한 트릭이다. ㅠ.ㅠ



그림책 "한 입만"에는 친구들이 들고 있는 먹을 것을 탐하는 티라노사우르스가 나온다.

이 녀석은 친구들이 뭘 먹고 있는 것만 보면 가서 "나 한 입만!"이라고 말한다.

녀석의 욕심은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배가 고픈 게 문제가 아니라, 친구들이 가진 거라면 뭐든 뺏고 싶다는 욕심이 메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재밌는 건 친구들의 각양각색의 반응이다.

트리케라톱스는 순순히 아이스크림을 내어주며 "그래, 그럼 한 입만 먹어."라고 말한다.

스피노사우르스는 피자를 내어주며 "좋아, 대신 딱 한 입만 먹어야 돼."라고 말한다.

디메트로돈은 고기 파이를 가지고 "안 돼! 이건 너무 작아서 나눠 먹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


물론 티라노사우르스는 친구들이 뭐라고 하건 말건 자기가 다 먹어치워 버린다.

그는 아주 큰 한 입을 먹기 때문이다.

"한 입만!"이라는 말을 두려워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악몽 같은, 최악의 상대인 셈이다.


티라노사우르스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런 일을 겪은 공룡 친구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까?

실제 그림책의 뒷 내용과는 별개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아마 친구들은 티라노사우르스가 보이면 모든 먹을 것을 숨길 것이다.

부당하게 뺏기지 않으려면 그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뺏긴 트라우마가 너무 심한 공룡은 어쩌면 티라노사우르스의 그림자만 보여도 멀리 도망갈지도 모르겠다.

'남의 것을 뺏아먹는' 티라노사우르스의 평판은 삽시간에 소문이 날 거고,

그러면 티라노사우르스에게 뭘 뺏겨보지 않은 공룡들도 슬슬 그를 피할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티라노사우르스는 정말로 배가 고파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땐 아무도 그에게 음식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남의 것에 욕심을 내는 것은 자충수일 뿐이다.

남의 것을 쉽게, 거저, 맛있게 얻어먹는 그 순간에는 마치 자신에게 이득인 것 같고,

손해보지 않고 뭘 얻은 것만 같겠지만, 이건 정말 근시안적인 생각일 뿐이다.

얻는 거라곤 "얄미운 녀석, 밉살스러운 녀석, 얍삽한 녀석, 얌체, 도둑놈, 불로소득 좋아하는 녀석"이라는 별명과 '기피 대상 1호'라는 타이틀 뿐이다. 결국 더 큰 것을 잃게 된다.


흠... 글을 쓰다 보니, 내가 라면 한 입 뺏기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게 되었다.

지난 시절, 동생이 끓인 라면 한 젓가락 얻어먹으려고 했던 나를 반성한다.

내 입장이 되면 그렇게 당연한 것이, 반대 입장이 되면 하나도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 둘 다가 나다.

뺏아먹고 싶어하는 것도 나고, 뺏기고 싶어하지 않은 것도 나다.

뺏아먹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되고,

뺏기고 싶지 않아하는 마음도 이해가 된다.


누군가 나에게 "한 입만!"하고 다가왔을 때,

빈 그릇에 내 라면의 절반을 담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 야식으로 맛있는 라면을 끓여왔을 때, "맛있게 먹어!"라고 하면서 건드리지 않거나,

아니면 "진짜 맛있겠다!"라고 하면서 나도 가서 끓여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럼 싸울 일도, 맘 상할 일도 없을 텐데.


아, 근데 이 글을 쓰다 보니 라면이 너무 먹고 싶네... 어쩌지... ㅋㅋㅋㅋ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 나. 비" - (27) 스트로 베리 베리 팡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