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에 나를 비춰보다" - (30) 뭐 어때!

by 마하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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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 나를 비춰보다" - (30) 뭐 어때!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목욕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때수건이 없다.

때를 밀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오돌도돌한 장갑(aka. 요술때장갑) 비슷한 게 있긴 했으나,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우리가 목욕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네모난 녹색 때수건이다.

난 오늘, 그걸로 밀린 때를 밀고 싶다.

아무 걸로나 대충 밀기도 싫고, 그냥 비누칠만 하기도 싫었다.

반드시 그게 아니면 안 된다.


대중탕에 때목욕을 가기 위해 오래 전부터 간신히 빼둔 시간이었다.

오늘 아니면 아침 일찍 목욕 갈 시간도 없다.

토요일 아침에 한의원에 침 맞으러 가기로 약속을 해두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 전에 때목욕을 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오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네모난 녹색 때수건이 없다는 이유로 목욕을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

이런 내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갑갑하고 싫은데,

한쪽 머리에선, 그게 뭐 대수냐고 그냥 가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나가려고 옷도 이미 다 입고 있는데도,

도저히 내키지 않는 것이다.

끙...


한심하고,

답답하고,

스스로도 이해 안 되는,

이 불편한 나를 어쩌지 못해 이불 위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뒹굴거리다가...

책장에서 이 그림책 제목을 보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적당씨는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뜨고선 화들짝 놀란다.

출근 시간이 훨씬 지난 늦은 시간에 깬 것이다.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적당씨는 이렇게 말한다.

"뭐 어때!"


이렇게 시작된 적당씨의 '뭐 어때'는 하루종일 이어진다.


넥타이가 삐뚤빼뚤 매어졌어도 "뭐 어때!"

강아지 해피 사료를 고양이 밥이랑 착각해서 줬어도 "뭐 어때!"

내려야 할 버스 정거장을 놓쳤어도 "뭐 어때!"

가방을 버스에 놓고 내렸어도 "뭐 어때!"

......

결국 말도 안 되는 결론에 이르러서도 "뭐 어때!" 하고 넘겨버린다.




이런 사람이 정말 있다면, 주변 사람들이 진짜 스트레스 받을 것 같다.

아니, 자기 혼자만 괜찮으면 다야?


"자기 혼자만 괜찮으면 다야?" 라고 쓴 다음에,

연이어서 그런 류의 사람들에 대한 욕을 줄줄줄 쓰려고 했는데...


"자기 혼자만 괜찮으면 다야?" 라는 질문에 갑자기 말문이 턱 막히면서,

아, 나는 이 말에 절대 동감할 수 없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 혼자만 괜찮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할 뿐더러,

더 나아가 절대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항상 '나'보다 더 크고 중요한 '남'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절대 안 돼.

나만의 이기적인 욕구를 채워서는 안 돼.

나보다는 남을 위하는 게 더 훌륭한 거야.


이게 어마어마한 절대 명령처럼 내 안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 맘대로 하고 싶을 때마다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죄책감을 느꼈고,

어떻게 해야 남들도 다 만족할 수 있는 결론에 이를 수 있을까를 매번 머리 터지게 고민했고,

하고 싶었던 많은 말을 삼키고,

하고 싶었던 많은 행동들을 누르고, 참고, 포기하면서,

그렇게 모두에게 합리적으로 보이는 최소한의 욕구들만 충족시키면서 살아왔다.


아!

혹시 그래서 그런 건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항상 많은 것을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내 욕구를 줄여왔기 때문에,

오히려 반대로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에 있어서는 내 마음대로 정확하게 되지 않으면 더 못 견디는 건 아닐까?

네모난 녹색 때수건처럼 말이다.

'내가 이런 작은 것 하나도 내 맘대로 못 해?' 하는 마음 말이다.


나에게 많은 것을 허용했더라면...

남들이 뭐라 하건 말건, '뭐 어때?'하는 심정으로 좀 더 나를 위해 살아왔더라면,

그랬으면 작은 뭐 하나가 내 맘대로 안 된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안달복달을 했었을까?

별 것도 아닌 이런 것까지도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다고,

이렇게 짜증내고, 분하게 생각하고, 억울해 했을까?


내 마음속에 고여있는, 냄새나는 웅덩이가 하나 있나보다.

푹푹 썩어가는 내 솔직한 감정이 그 안에 있나 보다.

정확히 어떤 건진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 속에 욕구 불만에 가득 찬 내가 있다.



헐... 의외다.

지금껏 내가 원하는 대로 거의 다 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기 시작했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불만이 한가득 있는 게 느껴진다.


그걸 느끼고 나니,

지금 당장 대중탕 뜨거운 물 속에 몸을 푹 담그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리고 그제서야 대중탕에서 네모난 녹색 때수건을 판다는 생각이 났다.

뭐여, 괜히 고민했잖아?


오늘은 소소한 것부터 꽤 큰 것까지,

내가 남부터 생각하느라 억누른 나의 욕구들이 어떤 게 있었는지 탕 속에 앉아서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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