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에 나를 비춰보다"-(35) 수박이 먹고 싶으면

by 마하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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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 나를 비춰보다" - (35) 수박이 먹고 싶으면



이 그림책은 수박을 먹기 위해 농부가 해야 하는 일을 자세히 설명해놓은 책이다.

언뜻 보면 수박 키우는 과정을 가르쳐주는, 학습 그림책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자세한 묘사와 순간순간 드러나는 농부의 마음가짐에서, 삶에 대한 성찰이 진하게 배어나는 작품이다.

한 마디로 거대한 삶의 주제를 '수박'으로 설명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너무 맘에 드는 그림책이고,

볼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좋은 그림책이지만,

그저 '그렇지, 그래야지' 이렇게 고개만 끄덕이다가 책을 탁 덮어버리는 순간,

이야기는 이야기만으로 남을 뿐, 내 삶에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삶의 중요한 이야기들을 내가 모르는 게 결코 아니다.

사실 다 아는 얘기다.

아니,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았고, 들을 때마다 '또 그 소리!' 하면서 콧방귀가 절로 나오고,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는 그럴싸하게 몇 마디 멋진 말을 해줄 수도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건 적용이다.

이 이야기를 나의 삶에 적용해보는 것.

나의 삶을 이 그림책에 적극적으로 비춰보는 것.

내가 어떻게 해나가고 있는지, 어느 부분에서 멈칫하고 있는지, 어느 부분을 힘들어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이 그림책을 진짜로 먹어버리는 것이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이라는 제목을,

'~을 갖고 싶으면', '~을 하고 싶으면', '~이 되고 싶으면' 으로 바꿔본다면, 나에게도 할 말이 생긴다.


젊은 시절, 나는 막연히 뮤지컬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뮤지컬 매니아로서, 뮤지컬과 관계된 것이라면 뭐든 좋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냥 관객으로서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 것으론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뮤지컬의 한 부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씨를 심어야 하듯이,

뮤지컬 공연장에서 프로그램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뮤지컬 웹진에다 뮤지컬 리뷰도 쓰고, 배우들 인터뷰 기사도 썼다.

분명히 전보다 뮤지컬 언저리에 다가가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도 만족이 되지 않았다.


나는 뮤지컬의 중심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배우가 될 수도 없고, 이제와서 무대나 조명 기술을 배울 수도 없고, 안무를 할 수도 없고,

결국 뮤지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포지션이 뮤지컬 대본 작가 겸 작사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당시엔 뮤지컬 작가가 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교가 없었고,

그나마 제일 비슷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문창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거기서 단편 소설과 희곡 등을 쓰면서, 비록 뮤지컬 대본은 아니지만,

글쓰기 실력을 기르고 있으면 언젠가는 뮤지컬 대본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뮤지컬 대본 작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수박씨에서 싹이 나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그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고, 우습지만 이제 다 된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그것처럼 기쁜 게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수박이 자라기 위해선 엄청난 인고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상상도 못 했었다.


나는 너무 미약하고 여린, 어린 싹에 불과했다.

상업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대본 쓰는 실력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경우, 마음이 사정없이 쪼그라들었고, 자책감에 몸서리를 쳤다.

대사 자체, 씬 자체에 대한 비판을 받을 때조차, 그 말이 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비판처럼 들려서 견디기 힘들었다. 감당하기 힘든 큰 사건 사고들이 터질 때마다 멘탈이 붕괴되었고, 조그만 수박 싹은 곧 만신창이가 되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뮤지컬이 나에게 고통 그 자체로 변질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내 수박은 크고 아름답게 다 익지 못했고, 작고 설익은 채로 끝났다.

내겐 끝내 머리통만한 튼실한 수박을 만들어낼 힘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어떤 부분에서 모자랐던 것일까?


나는 뮤지컬이 너~~~~~~무 좋았고,

그래서 무조건 하고 싶었을 뿐,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열심히 노력하면 잘 할 수 있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인 나에게,

공연이 끝난 밤 10시 이후부터 시작되는 뮤지컬계의 라이프 스타일은 전혀 맞지 않았다.

술, 담배는 물론이오, 커피조차도 마시지 못하는 내가 예술계에서 느낀 정서적 소외감도 꽤 컸다.

갈등을 싫어하고, 항상 건전한 해피 엔딩을 추구하는 내 글쓰기 방식이,

더 세고,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을 원하는 상업 뮤지컬 세계에선 무능에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오죽하면 조작가님은 그냥 아동극이나 교육극을 쓰시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나는 그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내가 뭘 잘 하는지, 어떤 성향과 체질을 가지고 있는지, 그게 뮤지컬 세계와 잘 맞는지 하나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뮤지컬을 좋아하니까, 나의 모든 것을 뮤지컬 세계에 맞추겠다는 열정 하나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열정은 연속적으로 터지는 힘든 일들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열정이 사라지자, 몸도 더이상 버틸 힘을 잃고 무너져버렸다.


나는 수박이 되고 싶었으나,

수박이 되기 위해선 어떤 지난한 과정을 다 겪어내야 하는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 나는....

너무 충격적이지만...

수박씨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ㅎㅎ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도 작게 생산해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내가 뮤지컬에 최적화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과물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비록 되다 만 수박으로 남았으나,

나의 뮤지컬 인생은 내가 맘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산 증거이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좋은 심리독서치유사가 되고 싶다.

씨는 이미 몇 년 전에 심었고,

작년부터 싹도 났다.


그림책 '수박이 먹고 싶으면'의 책장을 넘기며, 이제 나는 내 앞날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본다.

불필요한 곁순들이 있으면 아까워도 똑똑 따내야 하고,

한여름의 타는 듯한 무더위도 견뎌내야 한다.

고라니며 멧돼지며, 서리꾼들이 나를 노리고 덤빌 때도 겁내지 말고,

몸집이 점점 커져서, 몸통에서 좋은 소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커다란 수박이 된 나를 모두가 즐겁게, 맛있게 나눠먹는 그 날을 꿈꿔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계절은 다시 돌아온다.

씨를 뿌리자.

싹을 틔우자.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자.


수박이 먹고 싶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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