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에 나를 비춰보다" - (34) 터널

by 마하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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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 나를 비춰보다" - (34) 터널


그림책 '터널'에는 극과 극으로 다른 오빠와 여동생이 등장한다.

동생은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공상을 하는 걸 좋아하지만,

오빠는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뛰어노는 걸 좋아한다.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으니 마주치기만 하면 계속 싸운다.


급기야 화가 난 엄마가 둘 다 집 밖으로 쫓아내버린다.

둘이 같이 나가서 사이좋게 놀고, 점심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난 이 장면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와... 이런 조치는 여동생한테 불리한데...'

왜냐하면 밖은 오빠의 세상이기에, 오빠보다는 여동생이 겪게 될 파장이 훨씬 더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 어쩌면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이 여동생인 모양이구나!

- 이 책의 주인공이 여동생이라는 건 표지만 봐도 알 수 있다. ㅎ)


남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집 밖으로 쫓겨나는 장면에서 내 어린 시절의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그때는 눈이 잔뜩 쌓여있는 한겨울이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도 나와 남동생은 한바탕 싸움을 했었다.

그러자 불같이 화가 난 엄마가, 우리 둘을 대문 밖으로 내쫓았다.

그당시 우리 집은 한옥이었는데, 엄마가 대문을 닫고 커다란 빗장을 걸어채우고,

중간 유리 현관문까지 닫아버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생생하다.

동생과 나는 사라지는 엄마의 뒷 모습을 문틈 사이로 보면서,

양손으로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엄마! 엄마!'를 불렀지만, 엄마는 끝내 대꾸도 하지 않고 들어가버렸다.


그때 우리는 맨발에 내복 바람이었다.

동생은 천지분간 못하는 꼬맹이여서 상관없었겠지만,

나는 동네 사람들이 내가 내복 차림으로 밖에 있는 걸 볼까봐 창피했고,

슬리퍼 사이로 눈이 들어와 맨발이 얼어붙을까봐 무서웠고,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원인인 남동생이 미웠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난 채로, 빠른 걸음으로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앞으로 달음질 쳤다.

저 미운 꼬맹이로부터 멀리 멀리 달아나고 싶은 생각밖엔 없었다.


뒤에선 남동생이 절박한 목소리로 "누나! 누나!"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빨리 동생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뒤를 돌아보니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혼나고 나왔는데, 동생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면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는 정신없이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려내려갔다.

그러자 저 멀리서 동생이 눈물, 콧물이 범벅된 채로 오열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 동생을 껴안고 같이 울었다.



흠... 아주 오래 전 기억인데도 불구하고,

다시 생각하니 또 뭉클하다.


지금도 그 날의 차가운 공기와 나의 얼어붙었던 마음과 눈밭을 밟을 때마다 나던 뽀드득 뽀드득 소리와

찬 바람에 점점 감각을 잃어가던 맨발의 감촉이 바로 어제 겪은 것처럼 생생하다.


누나랍시고 맨날 동생에게 양보해야 하고,

넌 니 남동생이 없었으면 아무 가치도 없었을 거라는 소리나 듣고,

생선 먹을 때도 가운데 토막은 항상 남동생에게 가는 걸 보면서,

내 안에는 화가 가득 차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남동생을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어쩌면 그때 내가 잠깐 품었던 나쁜 마음이 죄책감으로 남았을 수도 있겠고.



지금 내 남동생은 다 큰 성인이 되어 자기 가족을 지키는 가장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서로 너무나 다르다.

나는 정신 못차리고 사는 몽상가이고, 동생은 지독한 현실주의자이다.

우리는 지금도 만나기만 하면 가치관 차이, 의견 차이, 방법 차이로 싸운다.


그림책 '터널'을 보면서,

변해야 하는 건 남동생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도 그림책에 나오는 여동생처럼, 집 안에 틀어박혀서 책이나 보고 공상이나 하면서,

너무 나만의 세계에만 빠져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현실을 너무 모르는 건지도.



다시 한 번 동생과 함께 쫓겨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둘이서 함께 터널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관계로 회복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남동생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가...

터널 속에서 오빠를 구한 여동생 로즈가, 오빠를 꼭 껴안고 올려다보는 그림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내 동생이 나보다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키도 나보다 크고, 느낌이 꼭 오빠 같아서 그런가...

나도 저렇게 남동생과 싸우지 말고, 꼭 껴안고 화해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남동생이 내게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현실 감각을 좀 기르려고 노력해야겠지.

이제 진짜로 좀 더 노력해볼까?

나의 동생과 더 친해지기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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