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왕의 권위로 꽃에 앉은 벌을 쫓으려고 한다. 그러자 벌이 “저도 여왕이거든요?”하고 말한다. 그렇다. 왕은 인간의 왕이고, 여왕벌은 벌의 여왕이다. 그들은 계급상으로 철저하게 동급이다. 물론 각자의 카테고리 안에서. 왕이 벌들의 세상에 들어가면, 벌들에겐 그저 침입자요, 쏘아서 쫓아버려야 할 귀찮은 대상밖엔 되지 않을 것이다. 벌들이 왕에게 복종할 리가 없으며, 왕이 가진 권위는 벌들이 준 바 없으며, 벌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반대로 여왕벌이 인간의 세상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제아무리 여왕벌이라 한들, 인간 세상에선 그냥 똑같은 벌이다. 잘못하면 나를 찌를 수도 있는 위험한 곤충. 그 뿐이다. 그들은 각자의 세상에선 왕일 수 있지만, 그 경계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김연아는 피겨 스케이팅 분야에서는 월드 탑 클래스이지만, 수학 천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나, 아니면 손재주가 갑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면, 그저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제아무리 노벨 물리학상을 탄 거장이라고 해도, 수상 스키를 전문으로 타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면 그저 겁먹은 초짜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 책을 수천 권 읽은 독서왕도 난생 처음 해보는 농사 일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게 당연하다. 이 분야의 탑이라고 해서, 저 분야에서도 탑이라는 건 통하지 않는 얘기다. 분야가 다르면, 기준이 달라지고, 기준이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
기준이라는 말이 애매하다면 ‘잣대’라고 해보자.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여러 가지 다양한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 이 사람이 외모가 뛰어난가? 이 사람이 눈치가 빠르고 일머리가 있는가? 이 사람이 힘이 센가? 이 사람이 숫자에 능한가? 이 사람이 말을 잘 하나? 이 사람이 미각이 뛰어난가? 이 사람이 유연성이 좋은가? 이 사람이 성실한가? 이 사람이 인내심이 강한가? 이 사람이 기계를 잘 만지는가? 잣대의 리스트는 한도 끝도 없다. 이 무수한 잣대 중에서 어떤 잣대를 나에게 들이댔느냐에 따라, 나는 그 잣대를 기준으로 한없이 하찮을 수도 있고, 한없이 고귀할 수도 있다.
각자의 영역에서 잘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해주면 편하다. 벌은 벌들의 여왕이고, 왕은 인간의 왕인 것을 인정하고, 우린 둘 다 왕이구나, 이러면 된다. 하지만 각자의 기준, 자기에게만 해당하는 잣대를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처사다. 두눈박이 왕국에서 외눈박이를 구박하는 것이나, 외눈박이 왕국에서 두눈박이를 구박하는 것이나, 둘 다 옳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엄마는 요리를 잘 하고, 나는 공부를 잘 한다. 동생은 숫자에 능하고, 나는 글자에 능하다. 누구는 식물을 잘 돌보고, 나는 사람을 잘 돌본다. 그럼 된 거지, 내가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능할 필요가 없다. 각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내가 못하는 건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다. 다 잘하려고 하면 너무 힘들다. 그게 내가 힘든 이유다.
내가 요리를 하면 처음이라 하더라도 잘 해야 하고, 내가 식물을 기르면 내 식물은 잘 자라야 한다. 못하는 게 당연한 건데, 못해도 되는 건데,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닌데, 혼자 부끄러워하고 민망해한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도. 도대체 나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 왕이다. 누가 왕인지 진검 승부를 할 필요가 없다. 다 각자의 왕이다.
더 나아가 자기 분야의 최고라는 것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글을 잘 쓴다고 해서, 글 쓰는 모든 사람들 중에 내가 왕이 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다른 분야는 언급조차 안 한다 해도, 그것조차 너무 힘든 일이다. 나는 나의 고유한 분야에서 오롯이 혼자 왕일 수 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이한 조합과 배경과 경험을 가진 ‘나’라는 분야에서 말이다. 너무 독특하고 고유해서,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그 ‘나’라는 영역에서 나는 온전한 왕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온전히 나 같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 다른 영역에 속해있는 외계인들이다. 도저히 같을 수가 없다.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공연히 쓸데없이 줄 세우지 말자. 그 상상 속의 줄 속에서 내 위치를 가늠해보지도 말자.
어쩌면 우리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레인에서 혼자 뛰고 있는 선수일지도 모른다. 주위를 둘러봐봤자 아무도 없다. 내가 감히 따라할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분야의 누군가가 내 앞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스트레스 받지 말자. 그는 나와 경쟁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우린 모두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 왕들이라는 걸 잊지 말자. 우리가 똑같은 처지에 있는 건, 그 유일한 길 위에서 죽음이 부르는 순간까지 계속 걸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서로 응원하면 그만이다.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너는 너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그저 그 뿐인 것이다. 그러니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다고 열 받지 말자. 내 삶의 속도는 내가 정한다. 내 삶의 질도 내가 정한다. 내 목숨이 허락하는 만큼, 그 안에서 내가 가고 싶은 만큼 가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