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것을 욕망하는 마음.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어 하는 욕구. 내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 색깔을 사랑한 박쥐, 루푸스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 겪어야 할 시행착오를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어느 날 밤, 여느 때처럼 먹이를 구하러 다니던 루푸스는 우연히 자동차 극장에서 총천연색 영화를 보게 된다. 그때 자신의 세상엔 없는 ‘색깔’이라는 것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리고, 색색으로 빛나는 낮 세상을 보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면서까지 잠을 자지 않고 낮에 깨어있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루푸스는 밝은 햇살 아래에서 다른 생물체들은 온통 컬러풀한 데 비해, 자신만 온 몸이 먹빛인 것을 재미없게 여기고 시무룩해진다. 그 전까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이 없었는데, 자기가 되고 싶은 존재들과 비교를 하다 보니,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박쥐다움’을 버리고, 다른 나비들처럼 화려한 색깔의 날개를 갖기 위해 온 몸에 색칠을 한다. 노랗고 빨갛고 핑크빛이 요란한 루푸스의 모습은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그의 속마음의 색깔이 이런 빛깔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먹빛 날개 속에 숨겨진 루푸스의 성격은 이렇게 밝고 명랑하고 쾌활한, 호기심 천국인 것이다. 아마도 루푸스는 그의 외모도 동일한 빛깔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총천연색 박쥐가 무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깜짝 놀라’며 루푸스에게 총을 쏘아댄다. 박쥐가 박쥐 같지 않을 때, 박쥐인데 이상한 박쥐일 때, 우리가 아는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이질적 존재를 만났을 때, 사람들은 겁을 먹고 무서워하고, 더 나아가 이런 괴물 같은 존재를 없애고 싶어한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우, 양쪽에서 미움을 받기 십상인 것과 마찬가지다.
처음엔 루푸스가 박쥐다움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자기가 아닌 남이 되고 싶어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수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든 사단이 생긴 거라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왜 낮에 돌아다니는 총천연색 박쥐가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생태계를 교란시켜서? 박쥐가 낮에 돌아다니는 건 사람들에게 위해가 될 수 있으니까? 박쥐가 까만색이 아닌 게 이상해서? 흉해서? 지켜야 할 선을, 경계를 넘었기 때문에?
나 아닌 다른 것을 욕망하는 것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사회를, 자기 수용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성숙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겪는 많은 문제들이 자기 수용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자기가 가진 것의 소중함, 귀함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 자기에게 없는 것, 결핍된 것만 원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자기 수용이라는 것이 “네 주제, 네 분수를 알고, 네 주어진 조건에서 만족하면서 그냥 살아!”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위험이 있다는 것도 알겠다. 특히 바꿀 수 없는 열악한 조건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결국 이것도 저울의 양 극단에서 중용, 중도를 찾아야 하는 일일 듯 싶다. 내가 가진 기본 조건을 인정하고, 나를 수용해야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주저앉아 자포자기 하라는 뜻이 아니기에, 우리는 좀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지금의 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온전해질 수 있다. 변할 수 없는 건 받아들이면서, 변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아! 또 '니버의 기도'에 이르고 마는구나!
선을 넘어선 루푸스의 최후가 죽음이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다행히도 자기 욕구에 충실했던 용감한 루푸스는 낮에 밖에 나오지 않았으면 절대 만날 수 없었을, 나비 채집 학자 타르투로 박사님과 인연을 맺게 된다. (용감한 자는 늘 행운을 만나기 마련이다) 색칠을 벗겨내고, 상처를 치료하고, 낮에 돌아다니느라 상한 눈을 보호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고, 박쥐의 습성대로 낮에 잘 수 있도록 지하실에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루푸스는 다시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가 얻은 것은 몸과 마음의 상처, 그리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두 가지는 늘 같이 간다. 새로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거기에 수반되는 아픔과 상처, 위험 또한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둘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하나만 얻을 순 없다. 루푸스는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과감하게 도전했고, 상처입었다. 하지만 루푸스가 얻은 것은 훨씬 더 많았다. 자신의 동굴집이 얼마나 편안하고 안락한, 자신에게 딱 맞는 곳이었는지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본성에 맞지 않게 무리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수확이 있었다면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된 것이다. 타르투로 박사님을 위해 루푸스가 밤에 나방 사냥을 해주는 것인데, 루푸스의 본성에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낮에 만난 인연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게 바로 대극의 통합이다! 서로 다름을 견뎌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 서로 윈윈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는 것 말이다. 그로 인해 과거보다 한층 더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대극의 통합이 주는 가장 위대한 결론이다. 원래대로 돌아간 것 같지만 결코 이전과는 같을 수 없는, 변화를 창출한 것이다.
사람들은 선을 넘는 자를 일단 무조건 싫어하고 본다.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같은 카테고리에 있는 사람들과도 경쟁하기 힘든데, 다른 영역에서 넘어온 사람들과도 경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재화가 한정되어 있고, 그래서 늘 경쟁해야 하고,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은 다 적이라고 생각하는 피해의식이 내장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에 재화는 무한하고, 크로스오버는 늘 새로운 영역들을 창출해내곤 했다. 선을 넘나들 때, 파이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몇 배로 커지곤 했다. 가능성들이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안다면 모두가 루푸스처럼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