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LIZZIE>의 에비 보든이 청산가리로는 죽지 못한 이유
Somebody 누가 사고 쳐
Somebody 집어 들었어
Somebody 이제 내려쳐
Somebody will die
주어는 없다. 마치 이 사건이 콜드케이스(COLDCASE, 미제사건) 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양.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집어 들어 내리쳤고,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죽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사건의 전부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용의자는 딸 리지였다.
리지는 왜 도끼를 들어야만 했나.
그만큼 미움이 컸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혹시 보다 세련된 살해 방법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사건을 알아보기 위해선, 뮤지컬 리지 <LIZZIE>의 배경이 되는 1892년의 어느 미친 여름날로 돌아가야 한다.
보든 가의 모든 문은 꽉 잠겨 있어
각방에 갇혀 말없이 전쟁을 치르고
1892년 숨 막히던 여름날
"지옥 문이 왈카닥 열린 거야" by 브리짓 설리반(보든가의 하녀)
4월 초 한국에서 여성 4인조 록 뮤지컬을 표방하며 개막한 뮤지컬 리지 <LIZZIE>는 미국 매사추세츠의 부호 보든가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결국 배심원들의 평결에 따라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가장 강력한 용의자였던 집안의 막내딸 리지의 이름을 따 지금까지도 <리지 보든 살인사건>으로 불리는 그 사건이다. 친부 앤드류 보든과 계모 에바 보든을 살해한 유력 용의자로 체포된 보든가의 차녀 리지가 결국 무죄로 풀려나며 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진범을 알 수 없다. 콜드 케이스는 언제나 매력이 넘치는 법, 더군다나 아버지와 계모를 살해한 딸이, 그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다니, 이 소재, 묘하게 극적이다. 그를 반증이나 하듯, 리지 보든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많은 2차 창작이 이뤄졌다.(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의 영화 리지, 뮤지컬 리지, 드라마 리지 보든 크로니클스)
뮤지컬은 1막에서는 리지가 어떻게 살인을 결심하는지에, 2막에서는 리지의 재판 씬에 집중한다
.
관객은 리지가 저지를 범죄의 목격자인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는 재판의 방청객이기도 하다.
사실 리지의 계모에 대한 살인 시도는 성공한 살인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리지는 계모를 향한 살인 시도를 했었다.
리지의 에비 부인에 대한 살인 시도는 언니인 엠마 보든이 아버지인 앤드류 보든이 계모에게 유리하게 유언장을 고친 것에 격분해, 집을 떠나고 나서였다.
브리짓이 언니인 엠마가 깜빡하고 떠났다며, 리지에게 넌지시 내미는 책의 이름은 바로,
가내 상비 독약서
책을 받아 든 리지는 이내, 노래를 부른다. 이 넘버에 리지가 사용하려고 했던 그러나 실패했던 독약, 청산에 대한 설명이 다 들어 있다.
청산? 왜인지 모르게 익숙하다면 첩보 영화의 파란 캡슐이나 박신양/김아중의 열연이 돋보였던 법의학 드라마 '싸인'을 열심히 봤었을 수도 있다. 맞다, 흔히 말하는 이름으로 청산가리. 그거다.
앵두 씨와 살구씨, 연한 빛깔 죽음, 푸른 독을 품은 것. 청산칼륨 치사량 150mg,
불 붙이면 푸른빛, 원형질의 독약, 끓는점 26도, 아몬드 향이 살짝, 몸을 마비시키고 호흡곤란을 유발, 피부로 흡수되면 발견되니 조심해.
섀터캐인과 벨벳 그래스, 산벚나무 열매, 토끼풀의 어린싹, 붉은 점의 나방,
앵두 씨와 살구씨, 연한 빛깔 죽음, 푸른 독을 품은 것 거칠고 아름다워.
가내 상비 독약서에 나온 대로 그냥 우유에 한 방울 넣고 갖다 주면 그만 잠깐 숨은 참아둬 두 눈도 꼭 감아.
뭐, 생각보다 쉬운데 깔끔하고 좋네
딱 한 방울로 보내요 보든 부인 잘 가요
그런데, 리지의 예상과 달리 보든 부인은 죽지 않았다. 시안화물의 독 작용이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라스푸틴의 암살범이 청산칼륨을 이용한 독살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자 결국 그를 익사시켰던 것을 보면, 라스푸틴의 경우는 상당량의 청산칼륨을 먹었지만 내약성이 높았던 것 같다.
순수한 청산을 경구로 먹었을 때 독 용량은 생각보다 낮다. 체중당 1.52 mg. 청산이 맹독이라 불리는 이유다. 리지의 계산대로 150 mg이라면, 100 kg의 거구도 너끈히 쓰러뜨릴 수 있는 양이지만, 청산은 청산 수화물. 칼륨이나 나트륨 염기가 붙은 채로, 존재한다. 즉 청산칼륨 150mg은 청산 150mg은 아닌 것이다. 또 수율(순수한 원료 얼마를 추출할 수 있는지)이나, 경구 흡수율, 생체이용률과 같은 개념을 더 해 생각해보면, 먹은 대로 다 흡수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청산가리는 대체 어떤 ‘독약’인 걸까?
시안화칼륨, 즉 청산가리의 유래는 고대 이집트인들부터였다. 주로 복숭아꽃에서 추출한 유사 청산칼륨이었다고 하는데, 복숭아꽃은 아니지만 복숭아 씨의 생약명은 도인, 살구씨는 행인, 앵두 씨는 욱리인, 셋 모두 장미과 식물의 씨앗으로, 가내 상비 독약서의 앵두 씨 그리고 살구 씨와 이집트 인들이 사용하려 했던 복숭아는 모두 아미그달린 성분을 공통으로 하는, 사촌 관계쯤 되는 약재들이었다.
이런 청산류는 편도(아몬드)와 같은 특유의 냄새가 난다. 청산가리를 이용한 음독을 의심할 때, 드라마나 영화에서 현장에 출동한 형사가 처음으로 호흡기 냄새를 킁킁하며 맡고, 아몬드 냄새가 나면 "시안화물 중독이라고, 응급실로 긴급 이송"을 부탁하는 근거가 바로 이거다.
청산칼륨이 워낙 맹독으로 알려진 탓에, 보든 부인처럼 살아나는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드물게 있었다. 1954년 벨기에 에게르몬트 사건은 청산가리가 들어간 초콜릿을 먹게 된 피해자들이 다행히도 살아난 사건인데,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기분 나쁜 맛과 석유냄새, 가슴의 울렁거림과 갑자기 턱 근육이 굳어져 말을 할 수 없었다" 고 증언했다. 그래서 몸을 앞으로 숙여서 초콜릿을 토해냈다고. 몸을 앞으로 숙여 초콜릿을 토해내는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그들은 살았다.
“벤스 약재상에 갈 거야. 청산을 사야 해. 얼룩을 지우려고”
절친 앨리스를 만나 이야기한 알리바이와는 달리,
하녀 브리짓에겐 해독제가 아니라 청산을 사러 간다 한다. 얼룩을 지워야 한다나?
물론 길을 가다 만난 앨리스에겐, 벤스 약제상에 가는 이유를 독이 든 우유를 먹은 보든씨 부부가 아파서라고 둘러댔지만 말이다. 천연 유래가 아닌 청산을 산다는 것이 위험한 줄은 본능적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리지는 처음엔 앵두 씨나 살구씨를 꺼냈던 것 같지만, 나중엔 화학적으로 정제된, 즉 보다 암살 성공확률이 높은 청산으로 바꿔 다시 계모 에비 보든을 없앨 시도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또 실패했겠지!
중독된 경우, 치료하지 않으면 수분 내지는 한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는 맹독이고,
1892년 당시는 치료를 위한 주사약들이 충분하지 않았던 걸 보면, 에비 보든 부인은 청산의 내약성이 아주 좋거나, 벤스 약재상에서 리지에게 판 청산의 품질이 불량이었겠지
마침내 리지는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보든 부인에게 행운은 세 번을 연거푸 웃어주진 않았다.
오히려 연거푸 두 번을 실패한 탓에,
더 확실한 방법을 원했던 리지는 도끼를 택했고
마흔 번이나 내려치는 결과를 택했다.
실패하지 않고 확실한 끝을 원했기에.
가내 상비 독약서에 나온 대로
한 방울을 우유에 톡 타서, 약발이 좋았더라면
차라리 에비 보든도 그리고 리지 보든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대신 우리는 이 매력적인 옛날이야기, 리지의 재판에 얽힌 여권운동,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지만, 배심원은 모두 남자인 광경을 마주할 기회를 좀 더 늦게 얻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