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맨 끝줄 소년'의 렉사틴과 프루팍스 -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누구
스페인의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동명 희곡인 '맨 끝줄 소년'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연극 맨 끝줄 소년은 2015년부터 2017, 2019에 이르기까지 세 번에 걸쳐 공연되었다. 수학과 철학교수인 작가 본인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창작된 희곡이라고 하는데, 그 경험이란 것이 시험 문제에 대한 답 대신 시험공부를 하지 못한 이유를 쓴 것이라 하니, 모든 대학가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교수님 전상서가 떠 오르게 마련이다. 이 희곡은 프랑스 영화 '인 더 하우스'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극의 중심은 고교의 선생님 헤르만(박윤희 분)과 천재적인 학생 클라우디오(전박찬 분)가 처음에는 과제로 시작한 글쓰기를 통해 친구인 라파 가족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 같기도, 또 깨뜨리는 것 같기도 한 지점에서 스승과 제자 간의 줄타기로 진행된다. 늘 맨 끝줄에 앉는 그가 사실은 맨 끝에 앉아 모든 사실을 관찰하는 전지적 관찰자였다고나 할까.
아이들의 형편없는 작문 솜씨에 실망하던 헤르만에게 클라우디오의 등장은 센세이셔널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위험하다는, 그래서 말려야 한다는 아내 후아나(우미화분)의 지적에도,
헤르만은 작문일 뿐이고, 아이 일 뿐이라는 핑계를 대어가며, 글의 다음 편을 기다린다. 웹툰이나 연재소설의 올라오는 날을 기다리며 새로고침을 누르는 현대인의 마음으로 말이다.
진정한 관찰자로 어쩌면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후아나와 두 가지 사건(라파 가족이 관련된 사건이자 글의 소재가 되는 직접 사건과 클라우디오와 헤르멘 선생님이 글을 주고받는 사건, 이렇게 두 가지의 사건이 얽혀 있는 극이라는 게 개인적 감상이다) 중 하나의 주인공이자, 나머지 하나에도 계기를 제공하는 남편 헤르만 사이의 대화 중 하나가 비록 이 희곡의 주류는 아니지만 많은 생각을 남기게 했다.
후아나 : 에스테르가 아픈가 봐
헤르만 : 왜?
후아나 : 렉사틴은 항 우울제야.
헤르만 : 나는 프루팍스를 먹어. 동료들 중 절반이 항 우울제를 먹는다고. 그리고 그게 에스테르 건지 그 남자 건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헤르만이 가지고 온 클라우디오의 작문을 나눠 일다, 집 안에서 발견된 항우울제 렉사틴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렉사틴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놓고 후아나와 헤르만이 대립한다
대개 우울증이라는 질병명을 들으면, 예민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여성 혹은 예술가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과연, 남자보다 여자가 더 우울할까? 실제로 우울증 환자 중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을까?
후아나가 당연하게 렉사틴의 주인을 에스테르(김현영 분)라고 추정하며, 그 근거로 렉사틴이 항우울제임을 들이댈 만큼 말이다.
결과적으로 남성의 유병률보다 여성의 유병률이 더 높다.
전체 정신질환의 유병률 면에서 남성의 정신질환 유병률이 여성 유병률보다 더 높은 것과는 다르게, 주요 우울장애나 불안장애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진단 및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2001년 시작되어, 매 5년 주기로 반복되고 있는 보건복지부 주관의「정신질환 실태조사」의 결과다.
이는 2015년 조사된 전 세계 통계는 물론, 후아나와 헤르멘이 살았던 스페인에서의 결과 또한 유사하다. 남성이 8.9%라면, 여성은 16.5%로 약 2배 즈음 높다.
그래서일까.
후아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렉사틴은 에스테르의 것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지 알 수는 없지만, 렉사틴이라는 이름에서 가장 먼저 떠 올린 항우울제는 렉사프로(성분명 에시탈로프람)였다. 실제 렉사틴이라는 제네릭이 한국에서는 판매되고 있기도 하다. 또 프루팍스를 들었을 때는 프로작(플루옥세틴)과 팍실(파록세틴)에서 고민이 되었지만, 세틴 그리고 세틴으로 끝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둘은 닮았다. 같은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다. 이름은 좀 다르지만, 렉사프로 역시 SSRI다.
프로작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항우울제로, 1987년 최초 출시 당시 마케팅은 바로 '행복을 파는 약'이었다.
이 약은 세로토닌의 활성을 증가시켜,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이는 같은 계열인 팍실이나 렉사프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SSRI의 효과는 약을 먹는 즉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재흡수를 막는 것 만으로는 이미 만들어져 있거나 한 세로토닌을 충분히 억제할 수 없기에 그 약이 누구의 것 이든 약을 먹고 3~8주는 지나야 약효를 얻을 수 있다.
렉사프로는 10mg 1알을 하루에 한 번 아침에 복용한다. 플루옥세틴인 프로작은 20 mg을 하루에 한 번 먹는데, 최근에는 90 mg을 1주일에 한 번 먹는 제형도 새로 나왔다. 이 밖에도 3가지의 비슷한 SSRI들이 더 있다.
SSRI는 현대인 중 유병률(일생 한 번이라도 이 병을 경험할 확률)이 점차 올라가는 주요 우울장애를 치료하는 데 있어, 적은 용량으로 서서히 복용할 수 있고, 증상이 잘 조절되는 약의 계열이다.
여성이 실제로 좀 더 많은 비율로 이 병을 앓지만, 헤르만이 말했던 대로 남자라고 해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선생님들은 더 많은 스트레스나, 우울, 불안을 경험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에스테르인지 아버지 라파(이동영 분)인지 둘 중 렉사틴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해주지 않고, 헤르만과 클라우디오의 갈등, 그리고 헤르만과 후아나의 세계마저 살짝 넘보았던 클라우디오의 뺨을 내리치며 극은 끝이 난다.
마지막 순간 클라우디오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지, 과연 에스테르를 콕 집어 렉사틴의 주인이라 불렀던 후아나는 렉사틴이 아닌 팍실이나 프로작, 세로자트 등 다른 항우울제의 주인은 아니었을지 그녀가 바로 보던 그림과 함께 생각이 나곤 한다.
인간이 인간의 삶을 침해하거나, 누군가를 조종할 수 있는가와 같은 극이 전해주는 메시지 말고도,
나도 모르게 남자는 우울증에 잘 걸리지 않지라고 생각했었던 건 아닌지 스스로들 되돌아보게 된다.
이번 시즌이 마지막 일 것이라고 했던 전박찬 배우의 클라우디오를 극장에서 객석 바로 옆에서 만나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