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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 Jan 10. 2020

렉사틴의 주인은 꼭 여자여야 했을까?

연극 '맨 끝줄 소년'의 렉사틴과 프루팍스 -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누구

스페인의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동명 희곡인 '맨 끝줄 소년'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연극 맨 끝줄 소년은 2015년부터 2017, 2019에 이르기까지 세 번에 걸쳐 공연되었다. 수학과 철학교수인 작가 본인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창작된 희곡이라고 하는데, 그 경험이란 것이 시험 문제에 대한 답 대신 시험공부를 하지 못한 이유를 쓴 것이라 하니, 모든 대학가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교수님 전상서가 떠 오르게 마련이다. 이 희곡은 프랑스 영화 '인 더 하우스'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극의 중심은 고교의 선생님 헤르만(박윤희 분)과 천재적인 학생 클라우디오(전박찬 분)가 처음에는 과제로 시작한 글쓰기를 통해 친구인 라파 가족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 같기도, 또 깨뜨리는 것 같기도 한 지점에서 스승과 제자 간의 줄타기로 진행된다. 늘 맨 끝줄에 앉는 그가 사실은 맨 끝에 앉아 모든 사실을 관찰하는 전지적 관찰자였다고나 할까.


아이들의 형편없는 작문 솜씨에 실망하던 헤르만에게 클라우디오의 등장은 센세이셔널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위험하다는, 그래서 말려야 한다는 아내 후아나(우미화분)의 지적에도,

헤르만은 작문일 뿐이고, 아이 일 뿐이라는 핑계를 대어가며, 글의 다음 편을 기다린다. 웹툰이나 연재소설의 올라오는 날을 기다리며 새로고침을 누르는 현대인의 마음으로 말이다.


맨 끝줄 소년의 포토존, 홀로 앉은 의자와 클라우디오의 뒷모습이 인상적이다
11월 5일 맨 끝줄 소년의 캐스팅보드 - 전체 원 캐스트에 주인공 클라우디오 역의 배우만 더블 캐스트(전박찬/안창현)라  클라우디오만 달라진다.


진정한 관찰자로 어쩌면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후아나와 두 가지 사건(라파 가족이 관련된 사건이자 글의 소재가 되는 직접 사건과 클라우디오와 헤르멘 선생님이 글을 주고받는 사건, 이렇게 두 가지의 사건이 얽혀 있는 극이라는 게 개인적 감상이다) 중 하나의 주인공이자, 나머지 하나에도 계기를 제공하는 남편 헤르만 사이의 대화 중 하나가 비록 이 희곡의 주류는 아니지만 많은 생각을 남기게 했다.



후아나 : 에스테르가 아픈가 봐
헤르만 : 왜?
후아나 : 렉사틴은 항 우울제야.
헤르만 : 나는 프루팍스를 먹어. 동료들 중 절반이 항 우울제를 먹는다고. 그리고 그게 에스테르 건지 그 남자 건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헤르만이 가지고 온 클라우디오의 작문을 나눠 일다, 집 안에서 발견된 항우울제 렉사틴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렉사틴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놓고 후아나와 헤르만이 대립한다

대개 우울증이라는 질병명을 들으면, 예민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여성 혹은 예술가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과연, 남자보다 여자가 더 우울할까? 실제로 우울증 환자 중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을까?

후아나가 당연하게 렉사틴의 주인을 에스테르(김현영 분)라고 추정하며, 그 근거로 렉사틴이 항우울제임을 들이댈 만큼 말이다.


결과적으로 남성의 유병률보다 여성의 유병률이 더 높다.

전체 정신질환의 유병률 면에서 남성의 정신질환 유병률이 여성 유병률보다 더 높은 것과는 다르게, 주요 우울장애나 불안장애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진단 및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2001년 시작되어, 매 5년 주기로 반복되고 있는 보건복지부 주관의「정신질환 실태조사」의 결과다.

이는 2015년 조사된 전 세계 통계는 물론, 후아나와 헤르멘이 살았던 스페인에서의 결과 또한 유사하다. 남성이 8.9%라면, 여성은 16.5%로 약 2배 즈음 높다.


가장 최근의 조사 결과인 2016년을 봐도, 모든 정신장애는 남자의 발병률이 높지만, 불안장애와 주요 우울의 경우만 여성의 비율이 1.5~2배 높게 나타났다. 출처 - KOSIS


그래서일까.

후아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렉사틴은 에스테르의 것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지 알 수는 없지만, 렉사틴이라는 이름에서 가장 먼저 떠 올린 항우울제는 렉사프로(성분명 에시탈로프람)였다. 실제 렉사틴이라는 제네릭이 한국에서는 판매되고 있기도 하다. 또 프루팍스를 들었을 때는 프로작(플루옥세틴)과 팍실(파록세틴)에서 고민이 되었지만, 세틴 그리고 세틴으로 끝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둘은 닮았다. 같은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다. 이름은 좀 다르지만, 렉사프로 역시 SSRI다.




프로작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항우울제로,  1987년 최초 출시 당시 마케팅은 바로 '행복을 파는 약'이었다. 

이 약은 세로토닌의 활성을 증가시켜,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이는 같은 계열인 팍실이나 렉사프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SSRI의 효과는 약을 먹는 즉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재흡수를 막는 것 만으로는 이미 만들어져 있거나 한 세로토닌을 충분히 억제할 수 없기에 그 약이 누구의 것 이든 약을 먹고 3~8주는 지나야 약효를 얻을 수 있다.


렉사프로는 10mg 1알을 하루에 한 번 아침에 복용한다. 플루옥세틴인 프로작은 20 mg을 하루에 한 번 먹는데, 최근에는 90 mg을 1주일에 한 번 먹는 제형도 새로 나왔다. 이 밖에도 3가지의 비슷한 SSRI들이 더 있다.

SSRI는 현대인 중 유병률(일생 한 번이라도 이 병을 경험할 확률)이 점차 올라가는 주요 우울장애를 치료하는 데 있어, 적은 용량으로 서서히 복용할 수 있고, 증상이 잘 조절되는 약의 계열이다.


여성이 실제로 좀 더 많은 비율로 이 병을 앓지만, 헤르만이 말했던 대로 남자라고 해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선생님들은 더 많은 스트레스나, 우울, 불안을 경험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에스테르인지 아버지 라파(이동영 분)인지  둘 중 렉사틴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해주지 않고, 헤르만과 클라우디오의 갈등, 그리고 헤르만과 후아나의 세계마저 살짝 넘보았던 클라우디오의 뺨을 내리치며 극은 끝이 난다.


마지막 순간 클라우디오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지, 과연 에스테르를 콕 집어 렉사틴의 주인이라 불렀던 후아나는 렉사틴이 아닌 팍실이나 프로작, 세로자트 등 다른 항우울제의 주인은 아니었을지 그녀가 바로 보던 그림과 함께 생각이 나곤 한다.

인간이 인간의 삶을 침해하거나, 누군가를 조종할 수 있는가와 같은 극이 전해주는 메시지 말고도,

나도 모르게 남자는 우울증에 잘 걸리지 않지라고 생각했었던 건 아닌지 스스로들 되돌아보게 된다.


이번 시즌이 마지막 일 것이라고 했던 전박찬 배우의 클라우디오를 극장에서 객석 바로 옆에서 만나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관극을 마치고 나오면, 매표소 위로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듯한 클라우디오의 모습이 투영된다. 마치 돌아가는 관객의 발을 잡아채는 것처럼


11월 5일은 관객과의 대화였다. 자신의 클라우디오에 대한 해석을 차분히 풀어놓는 전박찬 배우, 헤르만 선생님 박윤희 배우 그리고 후아나 우미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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