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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윤 Jul 10. 2019

혹시, 이상주의자이십니까?


혹시, 이상주의자세요? 아니면, 완벽주의자?


'이상'과 '완벽'이라는 순도 100%의 단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뭔가 모르게 찜찜한 듯 부정적으로 들리는 '이상주의자'와 '완벽주의자'.


*이상주의자: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삶의 가치를 두는 사람
**완벽주의자: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
                                               (출처: 다음 사전)




연주를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구를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늘 나의 관심은 해답을 빠르게 찾고 오래 기억하는 것보다 '왜(why)'라는 질문이 나에게 생기느냐 마느냐였다. 그것도 '도대체'가 접두어처럼 붙어있는 '왜'.


'왜'라는 질문은 나에게 다음 단계로 향하기 위한 필수 관문이었고, 이 단순한 질문의 부재는 백발백중 나의 무관심의 증거였다. 나에게 '왜'라는 질문해답 자체를 갈구하는 외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해답을 위한 '방향'을 탐색하는 나침반이었던 것.


어쨌든 꼬리를 물어 생겨나는 질문들을 쫒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탐구(探究)이고 과정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탐구의 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진리(眞理), 이상(理想)이자  완벽(完璧)해진 상태일 것인데, 찾아낸 이상과 완벽도 지속적으로 긍정적 의심을 받고 도전받는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만(?) 온전한 이상과 완벽은 도달도 어렵고 유지도 매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상주의자나 완벽주의자에 대해서 혹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끈질기게 추구하는 그 에너지를 과하다고 여겨서, 부정적으로 느꼈던 건 아닌지. 아니면, 이상주의와 완벽주의의 방향과 과정보다 결과에만 집착한 것은 아닌지. 이도 저도 아니면 알맹이 없이 허공에 흩어지는 말뿐인 허술하게 포장된 성격에 대한 거부이던지.



음악과 이상


음악에서도 '이상'은 추상적이고도 도달하기 어려운 목적지이지만, 연주자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는 면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음악적 아이디어를 연주를 통해 즉각적으로 보여야 하는 연주자에겐 '이상'이 늘 함께 해야 하는 숙명이며,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어렵기에 혹은 불가능하기에 연주자가 뒷심을 발휘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이, 연주의 방향, 해석, 표현의 논리를 그냥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들리고, 작곡가와 작품, 연주자, 청중으로 이어지는 소통 경로를 자의적으로 바꾸겠다는 선포로 들린다.


연주자가 '이상'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본질은 밝혀냄으로 뿌듯한 것이 아니다. 그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어려움을 이겨내며 본질에 가까이 다가감으로 느껴지는 경이로움과 감사함에 절로 고개 숙여질 때, 그 연주는 억지로 감동을 요구하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정반합, 중용, 융통성... 핵심은 갈등과 조화 그리고 발전이다. 거꾸로 말하면, 발전을 위해 갈등과 조화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갈등 없는 발전도 없고 발전이 전제되지 않은 갈등도 없다. 이 둘 사이에 조화라는 브릿지가 얼마나 빨리 생기는지의 차이일 뿐이고, 인내가 그 단단함을 받쳐주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혹은 현실에서 겪는 갈등과 어려움은 극복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과정일 뿐이고, 그 속에서 희망과 긍정의 에너지를 찾아나가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주의자나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듣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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