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樂 투어> 독일, 트리어(Trier)
독일에서 룩셈부르크 가까이,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로 서쪽을 향해 3시간 반 정도 달린 거리에 위치한 트리어는 다소 생소하지만, 고대 로마시대부터 현재까지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과거 갈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트리어는 독일 속의 '작은 로마'라는 별칭답게 트리어 대성당(Dom Trier), 포르타 니그라(Porta Nigra), 성모 마리아 교회(Liebfrauenkirche), 황제의 온천 유적지(Kaiserthermen), 원형극장(Trier Amphitheater), 고대 로마 다리(Römerbrücke) 등 곳곳에서 로마 시대의 유적을 볼 수 있으며,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생가(Friedrich-Ebert-Stiftung Museum-Karl-Marx-Haus) 등 도시 전체에 볼거리가 상당하다. 그런데, 이 중 트리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를 나에게 꼽아보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아울라 팔라티나(Aula Palatina)를 꼽을 것이다.
사실, 아울라 팔라티나는 내가 트리어를 방문한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유럽의 많은 성당과 교회를 다녀봤지만, 초기 기독교와 음악이 행해졌던 바로 '그' 장소와 아우라에 대한 호기심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무작정 찾아가서 역사를 마주하고 화려함 없이 투박한 그 웅장함을 제대로 한 번 느끼고 싶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변화가 있겠지만, 높은 천장과 벽돌로 쌓아 올린 구조, 그리고 길이 67미터(외부길이 75미터), 폭 27미터, 높이 33미터(220x90x108ft)의 현재 보존되어 있는 그 어마어마한 규모만 보더라도 당시 로마 제국과 황제의 위엄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아울라 팔라티나는 로마 시대의 유산 중에서 하나의 방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것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그 압도적인 규모와 함께 아울라 팔라티나의 현재 모습은 바로 옆에 공원도 있고 매우 정돈되어 있다. 그런데 본래 이 곳은 286년 경부터 황제를 위한 장소로 터가 닦이고, 황제를 위한 거대한 궁전 형태로 설계된 곳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일대가 황제를 위한 복합 시설이고, 바로 그 중심에 아울라 팔라티나가 있었던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아울라 팔라티나는 310년경에 지어졌다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궁전 일대는 293년경부터 모습을 갖춰나갔다. 규모가 상당했기 때문에 공사 기간이 길어 아울라 팔라티나는 로마 제국 내에서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갈리아, 게르마니아를 관할하던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가 밀라노(Milan), 아를(Arles)과 함께 트리어를 거점으로 머물렀을 때(306-316)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울라 팔라티나는 본래 음악을 위한 공간으로서라기 보다는 왕좌가 있는 공식적인 알현 공간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일종의 회관의 역할을 했다. 복합 시설이 갖추어진 황제의 거주지 속 중심부에 위치해 있기에, 그 주위로 작은 건물들이 여러 개 있었고, 그 자체도 지금의 다소 투박한 모습과는 다르게 내부에 다채로운 대리석과 금빛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고, 바닥과 벽에는 우리의 온돌과 비슷한 바닥 복사 난방 시스템(hypocaust system)도 갖추고 있었다.
유대인이자 로마 제국의 국민이기도 했던 예수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근간이 되었고, 사도 바울과 같은 사도들을 통해 퍼져나갔다. 당시 기독교가 추구했던 공동체 의식과 계층 간의 평등에 대한 관념, 내세 구원은 사회적으로 큰 충돌을 일으켰고, 로마는 종속민들에게 로마의 신들과 황제를 숭배한다는 전제 하에서 개인적인 종교 활동을 허용해주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고 단일신을 숭배한다거나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집단은 황제에 커다란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비밀리에 집회를 가진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거나 일부 순교하기도 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마침내 밀라노 칙령을 통해 313년 기독교를 합법화하고 교회의 사유화를 허용하면서 로마 군주로는 첫 번째 기독교인이 되었다. 물론 그의 인간적인 면이나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는 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지만, 기독교의 역사가 바뀐 중요한 순간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약 80년 후인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채택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은 점차 늘어나고 숨어서 하던 집회는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커다란 직사각형 형태로 된 '바실리카'(고대 로마인들의 공공건물이나 회관)는 기독교와 음악이 행해질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아울라 팔라티나도 역시 이런 의도로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아울라 팔라티나가 '바실리카'라고 불리게 된 것은 19세기 지역 사학자인 요하네스 슈타이너(Johannes Steiner)에 의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라는 의미인 '콘스탄틴-바실리카(Konstantin-Basilika)'는 이때 얻게 된 아울라 팔라티나의 또 다른 명칭인 것이다.
서양음악사에서 트리어의 아울라 팔라티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예배당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 곳이 처음부터 종교적인 장소로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음악을 위해 만들어졌고 행해진 장소였는지는 의문이 생긴다. 다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역사 속에서의 행적을 비추어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 넓은 공간에서 기도와 말씀을 전달하고 성가와 노래가 울려 퍼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가능하다. 4세기의 아울라 팔라티나는 기독교와 음악으로 채워질 수 있었던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공간인것이다..
유대교에 근거하여 시작된 기독교는 의식도 일부 유대교의 전통을 따른다. 성서를 영창하고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 매우 닮아있는데, 기독교인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집회에는 점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공간은 말보다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간혹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보다는 고립되어 지내면서 기도의 삶을 추구했던 독실한 신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매일을 살아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이 예배당과 수도원 등지에서 행해진 의식들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방식과 형태를 만들어냈고, 중세 교회 의식에서 시편과 찬미가를 노래하는 관습으로 규범화되어갔다.
예배당 안에서는 가독교의 가르침과 거룩한 사고에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음악만이 존재해야 하며, 가사가 없는 음악은 그러한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비난하거나 연주하는 것을 거부했다. 가사가 있는 노래 중에서도 찬양의 노래는 장려하되 쾌락을 추구하는 음악은 거부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많은 음악들이 무반주로 불려졌다.
395년, 로마 제국은 동과 서, 두 영역으로 분리된다. 로마와 밀라노에 의해 지배된 서로마 제국은 476년 붕괴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로 재건했던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지금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서로마 제국은 분열된 이후 여러 민족들에 의해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되었고, 결국 모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서방 교리를 따르되 자신만의 지역적 예배 의식을 만들어 나갔고 각각 지역별 전례와 성가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8세기경 서방 교회의 전례는 그 중 가장 우세한 지역이었던 로마의 방식을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배경에는 로마 지역의 주교였던 교황과 세속적 통치자들과의 결탁이 있었다. 교황은 교회 예배의 낭독이나 노래를 통일시키고 정치적으로 통치자들을 권위를 확고히 해줌으로써 일종의 동맹관계를 맺어나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그레고리오 성가' 발생의 역사로 이어진다.
아울라 팔라티나는 트리어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일을 겪어냈다. 5세기에 게르만족에 의해 일부 파괴되었고, 중세 시기에는 군사 요새로 사용되기도 했다가 12세기에는 애프스(apse, 교회 동쪽 끝에 있는 반원형 부분)가 트리어 주교의 숙소로 바뀌었다. 17세기에 훼손된 건물 벽의 일부를 새롭게 지어져 다시 황제의 공간으로 통합되면서 모습을 갖추어 나갔으며, 나폴레옹 시대와 프러시아 시대에는 군 막사로도 이용되다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IV, 1795-1861)에 의해 본래의 형태를 다시 갖추었고, 1856년에 개신교 교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4년 전쟁 폭격으로 또다시 피해를 입었지만 복원되었고,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UNESCO World Heritage)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아울라 팔라티나에서는 계속해서 연주 행사가 진행되고 있고, 입구 쪽에 위치해 있는 오르간으로 연주된 음악들은 CD로 발매되고 있기 때문에 원한다면 구입해서 들어볼 수도 있다. 혹시라도 트리어를 방문한다면 아울라 팔라티나에 꼭 들러볼 것을 권하고 싶고, 방문하더라도 내부에 별로 볼 것 없는 그냥 크기만 큰 예배당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음악이 연주되었던 숨결을 느끼고 그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으로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