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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윤 May 23. 2019

꿈꾸는 신혼집, 슈만 하우스

<도시.樂 투어>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 3탄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1840년, 30살의 로베르트와 21살의 클라라는 결혼한다. 사실 이 둘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는데, 클라라의 장래를 걱정했던 아버지 프리드리히가 결혼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둘의 첫 만남은 클라라가 9살, 슈만이 18살이던 18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클라라 비크(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 1819-1896)는 아버지와 함께 지인의 집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 이후 슈만이라고 칭함)을 처음 만났다.


클라라의 피아노 연주에 감동을 받은 슈만은 음악 선생이자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Friedrich Wieck, 1785-1873)에게 음악을 배우게 되었고 1830년에는 슈만이 아예 기숙학생으로 집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클라라와 슈만은 거의 매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슈만이 여러 도시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을 때도 지속적으로 연락하게 되었다.


슈만과 클라라가 서로에게 보인 관심과 응원은 이들의 일기편지에 고스란히 남아있고, 또 작품으로도 남아있다. 클라라는 14세에 작곡한 《변하는 사랑》(Romance Variée, op. 3)을 슈만에게 헌정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슈만은 《클라라 비크의 사랑에 의한 즉흥곡》(Impromptus sur une Romance de Clara Wieck, op. 5)을 작곡했다.

로베르트와 클라라 (photo courtesy of @musicnpen, 슈만 하우스 소장 그림)

하지만 클라라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돈벌이가 되는 딸의 능력에 집착했던 프리드리히는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일각에서는 그 반대가 거의 병적일 정도였다고.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슈만의 명성과 그가 남긴 수많은 아름다운 작품들을 생각하면 상황이 잘 납득되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시 클라라와 슈만의 상황을 보면 프리드리히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클라라는 어릴 적부터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 파리, 비엔나 등지에서 수많은 연주회를 가졌고, 뛰어난 기량과 음악성으로 찬사를 받으며 공공 연주회나 페스티벌 기간의 연주회 티켓을 매진시키는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쇼팽으로부터 그 연주력을 전해 들은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도 만나고 싶어 했을 만큼 클라라는 유럽에서 피아니스트로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황제 앞에서 연주도 했고, 1838년에는 비엔나에서 최고의 영예인 '왕실과 황제의 직속연주자(Königliche und Kaiserliche Kammervirtuosin)'로 칭송받기도 했던,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것이다.


그에 비해, 프리드리히에게 슈만은 법 공부를 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로 왔다가 문학과 음악에 빠지고 여러 도시에서 방황한, 그저 공부하다 옆길로 샌 무일푼의 청년이었다.


클라라가 수많은 연주활동을 이어나가는 동안, 슈만은 183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작품을 쓰고 『신음악잡지』 (Die 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 열중했다.


편지나 일기, 발견된 메모 등 기록을 통해 이들의 우정과 관심이 언제부터 본격적인 사랑으로 발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조금씩 다르지만, 1835년 즈음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클라라와 슈만이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활발하게 활동을 한 시기였으니, 역시 사람은 뭐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매력적이고, 사랑에 빠지면 뭐든 의욕적으로 하게 되나 보다. 


슈만의 청혼, 클라라의 비엔나 연주 여행 후 가출 등 여러 우여곡절 끝에, 1840년 9월 12일 슈만과 클라라는 결혼했고, 이 날은 클라라의 21번째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슈만 하우스(Schumann Haus)


슈만과 클라라는 결혼 다음 날인 클라라의 21번째 생일에 한 건물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1844년 드레스덴으로 가기 전까지 살았는데, 이 곳이 지금 라이프치히에서  '슈만 하우스'라고 알려진 곳이다.

 

슈만 하우스 전경(좌, 사진. Stadt Leipzig)과 로베르트와 클라라가 살았다는 표시(우, photo courtesy of @musicnpen)

슈만 하우스는 라이프치 외에도 슈만이 태어난 츠비카우(Zwickau), 클라라와 슈만이 1852년부터 1854년까지 머물렀던 뒤셀도르프(Düsseldorf) 등 몇몇 곳 있다.


이 중에서도 클라라가 태어난 곳이자 그녀가 슈만과 처음 만난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슈만 하우스는 이들이 결혼하여 신혼 초 4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또한 그들이 머무는 동안 리스트,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와 같이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동료 음악가들이 방문하기도 했다.


이 곳에서 슈만은 《사랑의 봄》(Liebesfrühling, op. 37), 교향곡 《봄》(Spring Symphony, op. 38),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 48), 피아노 5중주(Piano Quintet, op. 44) 등을 작곡했고, 피아노 5중주를 비롯한 많은 곡들이 클라라의 피아노 연주로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되었다.


슈만의 많은 작품들이 클라라의 연주와 함께 탄생한 것과 더불어, 그 근방 지역이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Breitkopf & Härtel)페터스 에디션(C. F. Peters)이 시작된 음악 인쇄와 출판의 중심지였으니, 한마디로 라이프치히의 이 집은 슈만 부부에게 창의적인 음악 활동이 가능했던 '꿈꾸는 신혼집'이었던 셈이다.



창의적인 '소리 공간'(Sound Room)


슈만 하우스 안에는 슈만의 자필본, 클라라가 연주했을 1825년 경의 프리드리히의 피아노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음악회가 열리는 '슈만 살롱'(Schumann Salon)이라 불리는 널찍한 응접실을 통해서 슈만과 클라라뿐만 아니라 방문했던 동료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모습도 상상해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놀이공간 같은 제법 큰 방 하나가 있는데, 얼핏 보면 이 곳은 슈만 하우스에서 좀 생뚱맞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방은 슈만 부부의 많은 작품이 탄생되었던 슈만 하우스 속에 이들의 '창의'라는 영감을 받아 새롭게 꾸며진 공간이라 볼 수 있다. 벽에 그려진 그림이나 실험적인 소리 장치 등 그 자체가 아이들의 놀이공간으로 안성맞춤으로 꾸며져 있고, 슈만과 클라라, 아이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매우 흥미롭다.


슈만 하우스의 소리 공간 (photo courtesy of @musicnpen)


천장에는 악기를 포함한 각종 소리 나는 도구들이 달려 있고, 그 아래에 서면 그에 걸맞은 소리가 난다. 여러 명이 각 도구들 아래에서 함께 움직여 보면 덩달아 소리도 섞이는데, 소리를 내는 이 도구들은 슈만과 클라라가 살았던 시대에 발명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듣기 좋은 소리도 있지만 증기기관차 소리나 소음같이 느껴지는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소리 공간 시현 (독일어 설명 포함. 출처 Schumann Haus, Leipzig)

설치 예술가 에르빈 슈타쉐(Erwin Stache)가 꾸민 이 '소리 공간'은 슈만과 클라라가 살았던 18세기 초중반, 정치적 격변이 사라지고 무거운 예술보다는 가정 안에서 시나 글을 쓴다던지,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는 등 소시민적인 예술활동이 나타났던 비더마이어(Biedermeier) 시대를 보여준다.


즉, 클라라와 슈만의 창작 공간이었던 슈만 하우스는 이들의 거주 공간이자 시대의 예술사조를 보여주는 창작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서로의 꿈을 지지해 준다는 것은 참 멋진 일


라이프치히가 '로맨틱'한 음악 도시의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된 데에는 '슈만 부부'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짧게라도 이들의 얘기를 해나가다 보니 LA가 배경이 된 영화 '라라랜드'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물론 영화 속 커플과 슈만 부부는 서로 다른 결말이지만, 서로의 꿈을 지지해주는 모습이 사랑의 또 다른 모습임을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느껴진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작곡을 하고 즉흥연주도 많이 했던 클라라는 1840년 결혼 이후에는 자신의 작품이나 즉흥연주를 거의 계획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연주회 관습이 바뀐 탓도 있지만, 음악적 영감이었던 클라라가 자신이 만든 음악을 연주해주길 원했던 슈만의 뜻이 컸다. 작곡가 남편과 연주자 아내의 행복한 모습, 그 이면에는 슈만을 위한 피아니스트로서 작곡가로서 재능 많았던 클라라의 희생이 있었고, 실제로 클라라는 일기를 통해 당시에 자신이 쏟아낼 수 있었던 많은 생각들이 그냥 사라지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클라라도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음악가로서나 여성으로서의 자존감과 성취감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여성 음악가들에 대한 관습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아버지의 지지남편의 응원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프리드리히는 클라라를 다소 과격하게 훈육하며 음악적 훈련을 시켰으나 결과적으로는 음악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슈만은 클라라와 함께 바흐의 평균율, 베토벤의 교향곡,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실내악곡을 공부하며, 서로 작곡과 연주를 발전시켜나갔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출산한 이후에는 이전보다 연주 여행을 다소 줄이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대중 앞에 섰다.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6년의 결혼 생활 동안 둘은 1번의 유산과 8명의 자녀를 두었으니, 그야말로 클라라는 결혼 기간 내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의 활동에는 슈만의 응원뿐만 아니라 엄마의 연주여행을 견뎌주고 기다려준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이 겹칠 수밖에 없다. 1840년에서 1854년 사이에 프로그램 모음에 기록되어 있는 연주회만 보더라도 클라라는 139회의 연주를 했다고 하는데, 비공식적인 연주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분명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면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클라라의 강한 의지는 이를 지지해준 가족들의 엄청난 배려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날 클라라는 다수의 베토벤 소나타를 공공장소에서 연주한 최초의 피아니스트이자, 쇼팽, 슈만, 브람스의 많은 작품들을 초연했고, 악보 없이 연주하고 자신만의 독주로 프로그램을 계획하여 독주회를 열었던 당대의 선도적인 피아니스트로서, 19세기 피아노 독주회의 성격을 바꾸어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클라라가 슈만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떠한 행보를 걸었을지. 그런 상상을 해보더라도 라이프치히의 슈만 하우스에서 만큼은 갓 결혼한 슈만 부부가 함께 음악과 미래를 꿈꾸는 풋풋한 공간이었음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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