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樂 투어>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 2탄
유럽 이야기를 하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도시.樂 투어>가 유럽 성당이나 교회 투어가 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좀 더 다양하고 흥미로운 음악 얘기들을 끌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라이프치히에서는 음악 출판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매년 봄, 국제도서박람회가 열리는 라이프치히는 작곡, 연주뿐만 아니라 음악 출판에 있어서 선도적인 도시다. 18세기 초부터 시작된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breitkopf & härtel), 그리고 19세기에는 호프마이스터(Hofmeister, Friedrich Hofmeister Musikverlag), 에디션 페터스와 페터스 음악도서관이 라이프치히에서 악보 출판과 보급, 그리고 보전에 힘을 보탰다.
작센(Saxony)으로 온 것은 우리 역사의 뿌리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해 전, 에디션 페터스 그룹의 디렉터였던 헤르만 에켈(Hermann Eckel, 임기 기간 2010-2016)은 그룹 본사를 프랑크푸르트에서 라이프치히로 옮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후 에디션 페터스 그룹은 런던, 뉴욕, 그리고 라이프치히를 거점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친숙하면서 대중적인 작품부터 현대 작곡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판 목록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그 역사도 깊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악보를 한 번쯤 접해 보았을 터, 알고 보면 좀 더 친근해지지 않을까.
에디션 페터스의 역사는 1800년 12월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엔나 출신의 작곡가 프란츠 안톤 호프마이스터(Franz Anton Hoffmeister, 1754-1812)와 라이프치히 출신 오르가니스트 암브로시우스 퀴넬(Ambrosius Kühnel, 1770-1813)이 라이프치히에서 '뷔호 드 무지끄'(Bureau de Musique, 음악회사)를 열고 악보를 제판하고 인쇄하여 팔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학문적 언어로 라틴어가 사용되었고 신분이 높은 귀족들이 프랑스어를 사교적 언어로 사용했던 상황을 생각해 보면, 프랑스어 상호는 그야말로 좀 있어 보이게 지은 이름인 것이다.
이들이 처음 출판한 것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실내악 곡이었고,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나온 건반악기 작품을 출판했다. 그러다가 호프마이스터가 1805년 비엔나로 돌아가게 되었고 퀴넬은 홀로 출판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주로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6)의 작품과 튀르크(Daniel Gottlob Türk, 1756-1813), 토마섹(Václav Tomášek, 1774-1850), 슈포어(Louis Spohr, 1784-1859) 등 오랫동안 친분이 있었던 작곡가들의 곡을 출판했다.
1813년 퀴넬이 세상을 떠나고, 라이프치히 출신 출판업자인 카를 프리드리히 페터스(Carl Friedrich Peters, 1779-1829)가 맡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뒤에 붙인 '뷔호 드 무지끄 C. F. 페터스'(Bureau de Musique C. F. Peters)라는 명칭으로 상호를 바꾼다.
패터스는 출판하는 작품의 폭을 넓혀서, 당시 활동하던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 리즈(Ferdinand Ries, 1784-1838)의 작품을 출판 목록에 포함시켰다.
1829년 페터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제조업자였던 카를 뵈메(Carl Gotthelf Siegmund Böhme, 1785-1855)가 맡아 동시대 작곡가뿐만 아니라 과거의 음악을 출판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J. S. 바흐의 많은 작품들이 출판되었다.
뵈메 사후에는 약 5년간(1855-1860) 라이프치히 시가 운영하다가, 1860년 4월 유통업자였던 율리우스 프리트랜더(Julius Friedländer, 1813-1883)가 인수했고, 1863년에 프리트랜더가 막스 아브라함(Max Abraham, 1831-1900)을 파트너로 고용한다. 프리트랜더가 막스 아브라함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은 이후 에디션 페터스의 역사를 볼 때, 신의 한 수라 볼 수 있을 만큼 큰 변화를 가져온다.
당시 라이프치히에는 카를 고트립 뢰더(Carl Gottlieb Röder, 1812-1883)가 제판업자가 있었는데, 1846년부터 자신의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던 뢰더는 1863년에 시간당 30장을 인쇄하던 것을 100장으로, 같은 해에 300장까지 인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뢰더는 자신만의 인쇄, 제본 방식과 이전보다 10배 빨라진 인쇄 속도와 함께 인쇄 기계의 보유수도 늘리면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막스 아브라함은 작곡가의 사망으로 인쇄를 할 수 있게 된 작품들을 뢰더에게 의뢰했고, 뢰더는 빠르고 저렴하게 에디션 페터스의 시리즈를 인쇄해내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단 기간에 많은 출판물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1867년 본격적으로 '에디션 페터스'(Edition Peters)가 시작되었다.
페터스 악보는 표지 색깔로 수록된 음악이 구분되었는데, 연한 녹색 커버는 저작권에 제한을 받지 않는 작곡가들의 작품이었고, 핑크색 커버는 페터스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출판사로부터 권리를 인정받은 작품이었다.
*위의 사진 중 핑크 표지는 쾰러(Louis Köhler)와 슈미트(Rich.Schmidt)가 에디터로 참여한 베토벤 소나타집이다.
1880년부터 막스 아브라함은 에디션 페터스를 총괄해 나가면서 보다 많은 악보를 출판하고, 목록은 당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들의 새로운 작품을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는 1894년에 페터스 음악도서관(Musikbibliothek Peters)을 개관했다.(글 마지막 부분에 자세한 내용 참고) 음악 출판물을 보급함과 동시에 컬렉션을 한자리에 모아 두기 위해 만들었으니 보전까지도 염두에 둔 것이다.
1900년 아브라함 세상을 떠나고, 에디션 페터스는 그의 조카인 헨리 힌리센(Henri Hinrichsen, 1868-1942)이 이어받았다. 힌리센은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 부르흐(Max Bruch, 1838-1920), 쾰러(Louis Köhler, 1820-1886),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 모슈코프스키(Moritz Moszkowski, 1854-1925), 레거(Max Reger, 1873-1916), 신딩(Christian Sinding, 1856-1941),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 볼프(Hugo Wolf, 1860-1903),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피츠너(Hans Pfitzner, 1869-1949),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 등으로 출판 목록을 더욱 확장시켰다.
프리트랜더가 막스 아브라함을 고용하고 그가 뢰더에게 인쇄를 의뢰하면서 출판 작품 목록에 확장이 가능해졌다면, 힌리센은 결과적으로 에디션 페터스가 국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업해야 하는 작품이 늘어나면서 힌리센은 세 아들과 함께 일하게 된다. 그러나 나치 정권 때문에, 세 아들 중 장남인 막스(Max Hinrichsen, 1901-1965)는 1937년 런던으로 갔고, 그곳에서 1938년에 힌리센 에디션(Hinrichsen Edition)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1975년에 '페터스 에디션 런던'이 된다.
둘째 아들 발터(Walter Hinrichsen, 1907-1969)는 1936년 뉴욕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1948년에 C. F. Peters Corp.를 설립하고, 많은 주요 미국 작곡가들의 악보를 출판한다. 이것이 바로 런던과 뉴욕이 에디션 페터스의 거점 도시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셋째 아들은 한스-요아힘(Hans-Joachim Hinrichsen, 1909-1940)인데 프랑스 페르피냥에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1940년에 에디션 페터스는 요하네스 페츠슐(Johannes Petschull, 1901-2001)이 회사를 인수하여 1950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사를 설립했고 힌리센의 두 아들 런던의 막스 그리고 뉴욕의 발터와 파트너로서 손잡게 되었다.
1945년 서독과 동독이 나뉘었고, 프랑크푸르트-런던-뉴욕의 시스템은 따로 유지가 되었다. 하지만 라이프치히의 에디션 페터스는 동독 정부에, 페터스 음악도서관은 라이프치히 시 소유로 운영되었다.
첫 번째 디렉터는 게오르그 힐너(Georg Hillner)로, 이 때는 라이프치히가 동독에서 공산주의 영향 하에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데사우(Paul Dessau, 1894-1979),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 1898-1962), 가이슬러(Christian Geisler, 1884-1969), 그리고 카차투리안(Aram Khachaturian, 1903-1978),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 등 북유럽과 구소련의 작곡가들의 음악을 주로 출판했다. 그리고 베토벤,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 포레(Gabriel Urbain Fauré, 1845-1924), 말러, 스크리아빈(Alexander Scriabin, 1972-1915),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 등 다수 작곡가의 원전판(Urtext)을 출판하기도 했다.
1989년 독일이 통일된 후, 라이프치히의 에디션 페터스는 페츠슐이 운영하던 프랑크푸르트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0년 8월, 에디션 페터스는 Peters UK, Peters Germany, Peters USA으로 나누어져 '에디션 페터스 그룹'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 '뷔호 드 무지크'가 시작되었던 고향, 라이프치히로 돌아왔다.
에디션 페터스는 동시대 작곡가, 과거 작곡가들, 동유럽과 구소련 지역의 작곡가들의 작품까지 출판 목록을 확장시키고 대중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결과적으로 보면, 긴 역사를 거치고 운영되면서 출판사를 이어나가기 위해 많은 출판 목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 어쩌면 오늘날까지의 가장 큰 무기이자 특징이 될 수 있었던 듯하다.
사업의 확장이나 유동성 면에서 라이프치히보다 프랑크푸르트가 더 편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업적인 배경을 떠나서, 그들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지나 '뿌리'를 찾아 라이프치히로 돌아오는 용기 있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막스 아브라함이 설립한 페터스 음악도서관(Musikbibliothek Peters, Peters Music Library)은 1894년 개관했는데, 여성들에게도 개방되었던 세계 최초의 공공 음악도서관이다.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나고 C. F. Peters를 이어받은 조카 헨리 힌리센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나치로부터 1938년 운영 금지 처분을 받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후 1945년 동독과 서독의 분리로 라이프치히 시에 의해 관리 운영되었는데, 1990년에 발터 힌리센의 미망인이 반환 요구를 하게 된다. 그러나 도서관 건물이 영구 임대 방식으로 되어있어 요구가 처리되지 않고 있다가 2004년 결국 힌리센 가에 반환되었다.
하지만 9년 후 라이프치히 시가 다시 사들였고, 도서관에 있던 J. S. 바흐, 하이든, 멘델스존, 슈만의 자필본 등 약 500종의 필사본들은 다시 라이프치히 시의 관리 하에 보존되고 있다.
*아래 건물은 지금 거주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한 때 페터스 음악도서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커버 사진 출처, Edition Peters Facebook
다음 이야기는 <도시.樂 투어> 독일, 라이프치히 3탄, "꿈꾸는 신혼집, 슈만 하우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