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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윤 Jun 07. 2019

노트르담의 음악가들

<도시.樂 투어> 프랑스, 파리(Paris) 1탄


파리의 중심


파리 한가운데 위치한 시테 섬(Île de la Cité)에는 프랑스 도로 기준점(Point zéro des routes de France)이 있다. '포엥 제로'라 불리는 방위가 적혀있는 이 동판을 밟으면, 반드시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설이 있는데, 그래서일까 이 곳은 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노트르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은 파리의 상징이자 프랑스의 역사파리 중심, 포엥 제로의 바로 동쪽에 자리한다. 그런데 얼마 전 2019년 4월 15일, 현지시간으로 오후 7시쯤 보수 공사 중이던 성당의 첨탑 주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다행히 큰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첨탑과 주변 지붕이 불에 탔고 안타깝게도 한동안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은 보기 힘들게 되었다. 재건과 복구에 대한 많은 시안들이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이 어떠한 모습으로 복구가 될지.


파리 노트르담 성당(사진. National Geographic)


노트르담 악파(L'École de Notre Dame)


노트르담 대성당은 1163년 공사가 시작되어 1345년에 성당 전체가 완공되었다. 그리고 첫 미사는 1183년에 이루어졌으니, 유럽의 대성당들이 그렇듯 노트르담 대성당의 미사도 꽤 오랜 세월 동안 성당의 공사와 함께 이루진 셈이다.


공사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높은 첨탑과 서쪽에 있는 두 개의 탑이 세워지고, 정교한 장식이 더해져 고딕풍의 성당이 점차 모습을 갖춰나갔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곳에 몸담은 음악가들 역시 이전 음악에 비해 길고 섬세하고 복잡한 음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photo courtesy by @musicnpen)


음악사에서는 12-13세기 이 곳에서 활동한 작곡가들을 일컬어 '노트르담 악파'라고 부르며, 이들의 음악과 활동에 대해서는 필사본이나 이론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익명 제4번』(Anonymous IV)


19세기에 중세음악을 연구한 이론가이자 음악학자인 찰스 쿠세마커(Charles Edmond Henri de Coussemaker, 1805-1876)는 13세기-16세기 이론서를 모으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가 수집한 컬렉션에서 저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자료는 '익명'으로 분류되었는데, 이 중 4번째 이론서  『익명 제4번』(Anonymous IV)에서 중세 기보법에 대한 내용과 노트르담 다성음악과 관련된 음악가들에 대해 언급이 발견된다.


『익명 제4번』은 프랑스로 유학을 온 한 영국인이 1275년 경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저자는 이론가나 음악가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음악과 관련된 일을 했거나 적어도 음악에 익숙한 학생 혹은 선생님의 위치에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익명의 저자는 당시 활동했던 음악가에 대한 언급뿐만 아니라 자신이 머물렀던 파리의 음악 환경과 상황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당시 활동했던 음악가들의 개인적인 정보나 우리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익명 제4번』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노트르담 음악가들이 행했던 작곡법에 대해 저자가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면서 자신의 관점에서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등 음악에 대해 솔직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음악에 대한 이해의 범위와 가능성을 한층 넓힐 수 있다.


그래서 이 익명의 이론서는 요하네스 가를란디아(Johannes de Garlandia)와 프랑코 데 콜로뉴(Franco de Cologne)의 저술과 함께 중세에 선율의 리듬이나 음표의 길이에 대해 다루는 중요한 이론서로 평가받는다.



레오냉(Léonin)과 페로탱(Pérotin)


『익명 제4번』에는 노트르담 악파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레오냉과 페로탱의 이름과 음악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레오냉(1150s-ca.1201)은 시인으로도 활동했으며, 노트르담 대성당의 참사회 회원으로 이후 사제가 된 인물이다. 『익명 제4번』에서는 레오냉을 훌륭한 '오르가니스타'(organista)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는 레오냉이 다성음악으로 집대성한 『오르가눔 대전집』(Magnus liber organi)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레오냉의 '대전집'에는 미사와 관련한 곡들로 층계송(Graduals)이나 알렐루야(Alleluias) 등 교회력에 따라 사용될 수 있는 곡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다성음악의 초기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익명 제4번』에서의 관련된 언급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오르가눔 대전집』이 레오냉의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 다수의 레퍼토리를 모아 만든 여러 사람들의 합작품이라는 의견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레오냉이 분명 편찬에 큰 역할을 했겠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때문이다. 그러나 실려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보존함에 있어 레오냉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  『오르가눔 대전집』은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볼펜뷔텔의 필사본과 피렌체의 필사본으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페로탱(1170-1236)은 12세기 말 이후로 노트르담 대성당과 더불어 지성과 혁신의 중심이었던 파리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익명 제4번』에서 페로탱은 '마스터'(master)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 때문에 페로탱이 파리 대학에서 학위 과정을 마쳤던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페로탱은 음악에 숙달된 한 사람, 마스터로서, 레오냉이  『오르가눔 대전집』에서 보여주었던 다성음악의 초기 형태인 2성부 음악을 3성부, 4성부로 확대시키고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보다 발전된 음악을 보여준다.


즉, 페로탱의 음악은 성부가 추가되면서 음향적으로도 더욱 풍성해졌고, 성부 선율 자체는 보다 장식되고 정교함이 더해졌는데, 이러한 음악이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photo courtesy by @musicnpen)


선율을 장식하고, 성부를 추가하고, 리듬을 분할하여 보다 섬세하게 사용하려 했던 12-13세기는 그야말로 치열하게 음악 만들기가 행해졌던 때이다. 하지만 오늘날 레오냉과 페로탱의 음악을 들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귀가 쉴 새 없이 많은 것을 담아내려 하는 소리에 시달려서일까?



페로탱의 Viderunt Omnes 앞부분


*이 글은 <도시.樂 투어> 프랑스, 파리(Paris) 2탄 "노트르담 음악가들의 음악 기록하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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