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혼자입니다.
예능인들이 쓸모가 많긴 한가보다. 노래를 잘하던 춤을 잘 추던 악기를 다루던 예능 쪽으로 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잘 끌려다닌다. 어떤 행사든 음악과 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지 않은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능인들은 힘이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무대를 선택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대부분 힘이 있는 타인에 의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다니기 십상이다.
중학생 시절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다니게 될 거라는 내용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각종 간식을 들고 거동이 불편한 지체장애우들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다. 평소에 지체 장애우들을 볼 일이 없었던 터라 그들을 처음 본 순간 너무 당황한 기억이 있다. 침대나 휠체어에 의지하여 나의 연주를 들으러 모인 사람들이었는데 그때는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솔직히 몰랐다.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는 이유로 여기저기 참 많이 끌려다녔고 대학생이 되서까지 여기저기 끌려다닐 때였다.
치매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에 키보드와 마이크가 설치되었고 우리는 노래도 부르고 악기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를 하게 된 장소는 작은 휴게실이었는데 우리의 연주를 듣는 분도 계셨지만 연주 소리를 배경 삼아 TV를 시청하고 계신 분도 계셨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곳에서 봉사를 계속하야겠다는 결심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연주가 끝나고 너무 좋았다고 자신의 사탕을 내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신 할머니 때문이었는지 단순히 봉사점수를 많이 모아야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나는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계속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하지만 1년 동안의 프로그램이 이미 잡혀있던 요양원에서는 봉사를 하겠다고 혼자 온 음악대학 학생을 딱히 반가워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안된다고 하면 오히려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는 성향이 있는 나는 결국 어르신들에게 책을 읽어드리는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다.
일은 간단했다. 요양원 제일 위층 도서관에서 책을 골라 원하시는 분들에게 읽어드리면 되는 일이었다. 방마다 기웃거리며 "책 읽어 드릴까요?" 하는 모양새가 흡사 방문판매원 같았지만 그렇게 몇 주 돌아다니다 보니 먼저 인사를 해주시는 어르신도 생겼다. 그들의 치매 진행 속도는 각기 달랐고 건강상태도 매일 다른 상황이었기에 책을 읽어 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속 바뀌긴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책을 읽어 달라고 하는 분들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주 보는 분들이 나를 잘 기억해주시고 책을 읽어 줄 때도 더 즐거워해 주셨기 때문에 자주 드나드는 방만 들어갈 때였다. 자주 들어가던 할머니들 방에 들어가려는 데 우연히 아야코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침대를 발견하였다. 왜소한 체격에 말씀이 없으신 분이었는데 알고 보니 한국어를 못하시는 분이었다.
그분의 사연은 이랬다.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17살에 일본인 남성과 결혼했는데 남편분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일본에 홀로 남게 되었다. 두 분 사이엔 자식도 없었고 일본의 도심이 아니라 시골 마을에서 계속 거주를 하셨던 터라 한국어를 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최근에 한 봉사단체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오셨지만 한국엔 가족도 없고 치매도 진행되고 있었다.
아야코 할머니의 사연을 듣고 나니 그분 방에서 쉽게 발길이 옮겨지지 않았다. 그 후에 서점에 가서 일본어 단어장을 하나 사 공책을 들고 다시 할머니 방을 방문하였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단어장을 공책에 베껴 쓰는 일이 전부였지만 할머니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아하셨다. 일본어로 뭐라고 계속 말씀하셨지만 일본어 초초급이었던 내가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그분과의 추억이 쌓여갔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오면 여러 장의 사진을 보여 주시 시작했다.
어르신들과 친해지면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가족사진을 봉사자들에게 보여주신다.
"이 애는 우리 딸. 대전에 살아."
"이 사람은 우리 영감, 젊었을 땐 참 잘생겼어."
이미 여러 번 보여주신 사진인데도 다시 꺼내서 또 보여주시는 것이 가족들 사진이고 가장 행복한 순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야코 할머니 사진들은 좀 달랐다. 그녀의 가족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었고 나이도 제각각이었다. 나중에 요양사분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아야코 할머니가 보여주시는 사진 속 인물들은 아마 할머니를 도와주신 봉사자들 사진일 거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던 '가족'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 사람과 결혼했지만 한국과 일본 그 어느 곳에도 가족이 없는 그녀도 어딘가에 계속 속해있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들을 가족이라고 여기고 그녀에게 남겨진 생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양원의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가족이 있지만 홀로 떨어져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쓸쓸하거나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였던 사람도 본인의 가족과 떨어져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의지하며 그들과 가족이 되는 삶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요양원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모든 사람이 혼자이고, 혼자와 혼자가 스쳐 지나가는 만남을 계속하며 사는 게 인생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족이라는 것이 영원한 울타리가 될 수는 없으며 혼자 사는 삶이 항상 외롭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작은 손길이 가족과 같은 따뜻함으로 느껴지기도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