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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음 Oct 22. 2020

컨테이너 학교

-비루한 이상주의자의 기도

 가을이면 항상 생각나는 일이 있다. SNS에 올려놓은 사진들이 그때의 일을 일깨워주기도 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일은 내가 가지고 있던 사회에 대한 기본적 마음가짐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아마 내년 이맘때도 그때의 일을 회고하고 있을 것이다.     


 20대의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고민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안정적인 생활을 목표로 교직 이수를 선택했고 교생실습을 준비할 때였다. 학과실 게시판에 교생 모집 공고가 붙어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는데 그 공고가 나의 시선을 끈 이유는 ‘대안학교’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이미 모교로 교생실습을 가기로 신청을 해놓은 상태였지만 20대의 혈기 왕성함은 도전이라는 선택을 하게 하였다. 나는 모교 선생님께 사과를 드린 후 교생실습 기간을 1학기 미뤄 가을에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참...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잘 알아보지 않고 일을 저지르는 데는 타고났다.     



 나는 학교에 도착해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챘다. 내가 생각한 대안학교란 기존 교육시스템에 문제의식을 느낀 선생님들이 모여 새로운 시스템을 시도하는 혁신적인 학교였다. 그러나 내 눈앞에 놓인 학교는 허허벌판에 컨테이너 여러 동이 널브러져 있는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학교였다. 학교를 구경하는 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첫날 슬쩍 구경한 학교의 모습은 흡연실이 따로 마련되어있고 전신에 문신을 한 아이들이 오토바이를 몰고 아무렇지도 않게 등교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학과실 선생님이 “거기 많이 힘들 텐데요...”라고 힌트를 줬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첫 주는 주로 선생님들의 수업을 참관하는 것이 다였지만 참관하는 것조차 힘든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1교시에 아이들이 오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선생님만 빈 교실을 지키는 경우가 허다했고 아이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졸업장만 받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왔기에 수업을 집중해서 듣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학교 측도 학교가 마치는 시간 전까지만 아이들이 오면 등교한 것으로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렇다. 내가 간 그곳은 일반 학교에서 받아 주지 않는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였던 것이다.     



 첫 일주일이 지나자 드문드문 오긴 하지만 내가 맡은 반 아이들 얼굴도 익혔고 딱 봐도 어리바리한 교생 선생님이 불쌍했는지 먼저 말도 걸어주는 학생이 생기자 한결 편해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내에서 경찰차를 보게 되었다. 그들이 온 이유는 학생 한 명이 엘리베이터에 있던 노인을 폭행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뉴스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정말 극소수의 사건만 다루고 있는지 교생실습 2주 만에 미디어의 한계에 대해 논하게 될 줄이야. 


 교무실은 시끌시끌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교생에게 선생님들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해줄리는 없었다. 그렇게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가고 그 사건이 대충 마무리가 되는가 싶더니 이번엔 17살 학생이 같은 학교 남자 학생과 성관계를 하여 임신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남자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울분을 토하며 남자아이를 마대자루로 때리시는 걸 목격했고, 나는 부모도 아닌데 뭘 저렇게까지 분해하나 싶어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임신한 여자 아이의 어머니도 그곳의 출신으로 그녀 역시 17살에 그 아이를 출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선생님이 왜 핏대를 세우며 분노하셨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는 폭행, 절도, 자해, 왕따 등등으로 얼룩져있었고 그들은 가해자이기도 했고 피해자이기도 했다. 뉴스에서 보는 모든 사회문제가 한곳에 집중되어있는 듯한 그곳에서 나는 그저 한없이 바보 같은 교생 선생님일 뿐이었다. 그때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속에서 정신도 못 차린 채 멍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책상을 붙여놓고 잠을 자더라도 학교에 와주는 아이들이 고마웠고 하교시간 10분 전에 덜렁 와서는 “선생님 저 왔어요. 이제 가요” 이러고만 가도 감사했다. 파키스탄에서 왔다는 아이는 반말을 밥먹듯이 하며 나를 친구 대하듯 했지만 반말이면 어떻고 존댓말이면 어떤가 인사만 했으면 됐지 싶었다.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아이들과 대화를 할 시간이 많아졌는데 아이들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내가 보고 자란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작은 사회 었던가를 알게 해 주었다.     



 자의든 타이든 자신의 또래보다 훨씬 빨리 사회로 나와버린 아이들은 이미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봤고 동시에 사회의 어둠에 노출되어있었다.         


  

 “어떤 아줌마한테 호스트 해볼 생각 없냐고 제의받았는데 제가 거절했어요. 월 300만 원 준다고 했는데... 할 걸 그랬나?”     


“배달 열심히 해서 등에 문신할 거예요. 등판 전체에...”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몸에 몇 백만 원하는 문신을 새겨 넣고 호스트 제의 받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이를 보며 저 아이들의 잘못이 저 아이들만의 잘못 인가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학교에서 사회로 나왔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어른들의 이기심과 악의 었다. 아이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반성할 기회 조차 얻지 못했다. 그저 계속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이 잘못인지 모른 채 다시 잘못을 저지르는 악순환에 빠져있었다.     



 교생 실습이 끝나는 날 내가 맡은 반 아이들이 거의 다 출석을 했다. 내가 짜장면을 사준다고 해서 온 것인지 정말 나를 배웅해주기 위해서 온 것인 지 알 수는 없으나 교생실습 가서 우는 애들 꼴불견이라고 했던 나를 그들이 울렸다. 그때의 감정은 어떤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것이었다. 그날, 아이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얀 코트를 입고 잔뜩 멋 부리고 갔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 먹은 것들 정리하고 치워야 하는데 그러고 갔다는 것 자체가 참 끝까지 생각이 없었다 싶지만 깊은 생각 없이 살던 시기였기에 그곳에서의 한 달을 그 어떤 선입견 없이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세상의 빛에는 관심이 많지만 어둠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던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세상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점 같이 작은 세상인지도 모른다. 교생실습을 다녀온 후에 나는 분명 사회를 보는 시각이 조금 더 넓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까짓게 뭐라고 뭘 할 수 있겠어?’ 하고 여전히 눈에 보이는 어두운 것들을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얼마 전 20대 미혼모가 자신의 아이를 중고물품을 파는 앱에 팔려고 한 사건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그 기사 아래에 달린 수많은 질타들을 보면서 나는 마음 한편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한 행동은 패륜 행위에 가까운 나쁜 일이라 생각하지만 여전히 점 같은 세상 속에서 빛만 쫓아서 살아가는 내가 타인을 욕할 자격이 있나 싶은 것이다. 살기 좋은 세상을 원하는 것만으로도 살기 좋은 세상이 저절로 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두운 세상과 마주할 용기 조차 없는 비루한 이상주의자는 오늘도 어둠의 그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이들의 행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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