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들이여 언젠가는 그대들의 시대가 옵니다.
“네가 보는 영화는 믿고 거르는 영화지.”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내가 선택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다른 것 같지 않은데 “너 좀 독특해.” “너 취향이 이상한 것 같아.” 등등의 소리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버렸다. 뭘 먹나, 뭘 입나, 어떻게 생각하나,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 저렇게 좋아하지? 항상 소수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취향이라는 것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나는 언제나 소수가 하는 선택을 골랐다. 드라마를 보더라도 평균 시청률 5% 미만의 드라마만 어떻게 그렇게 쏙쏙 잘 고르는 지. 지금이야 TV말고도 볼 것 들이 많아서 드라마 시청률이 낮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저녁 시간대 드라마 시청률 20%는 쉽게 나오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르는 드라마마다 그 모양이었다.
소수의 입장에 자주 놓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되고 소심해지기 시작했다. 연주를 하는 사람에게 소심하다는 것은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대학교 때 교수님이 오죽하면 나에게 ‘외계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을까 싶다. 부모님 말에 의하면 사춘기도 없었던 아이었는데 성인이 돼서 자꾸 겉돌기 시작했다. 모든 악기 파트가 다 모이는 오케스트라 합주 시간은 어찌나 싫던지. 가끔은 기절해서 병원에 실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때부터였다. 혼자 여행을 다니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다른 과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는 혼자라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 같다.
음악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인데 “네 소리가 이상해.” “그게 진짜 맞다고 생각하니?” 등등의 말을 들으니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 한 친구가 내게 다가와 밥을 같이 먹자고 다가와주었다. 그 친구는 주변에 친구들도 많고 선배들과도 잘 지내던 요즘 말로 하면 인싸인 친구인데 구석에 처박혀 학교를 때려치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아이에게 왜 관심을 가졌는 지 당시에는 이해가 안 갔지만 나중에 그 친구가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을 때 나는 무릎을 탁치며 역시!라고 외쳤다. 약한 자에게 손을 먼저 내밀 줄 아는 용기 있는 자는 아쉽게도 세상에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그 친구 덕분으로 다수의 무리에 섞여 학교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영화를 봤다하면 10명 미만의 관객들과 함께였고 어쩜 골라도 그런 전시만 꼭 고르는 지 미술관에 나만 혼자 덩그러니 있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1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원치 않았던 원했던 여전히 ‘독특한 취향’이라는 말을 종종 들을 때였다. TV에 내가 알던 얼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학로 작은 무대에서 관객이라곤 10여명이 전부인 연극을 하던 배우였는데...심지어 어떤 배우는 주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술관도 마찬가지였다. 건물 전체를 빌린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산했던 미술관은 평일 오전 9시에 가도 사람이 많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을 정도로 나랑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지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선 자랑이지만 요즘 나는 친화력이 좋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처음 본 사람에게도 말을 잘 걸고 낯가림도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기도 하나보다. 학창시절의 나를 아는 지인들이 지금의 나를 보면 같은 사람인가 싶을 것이다.
굉장히 오랜 시간 소수의 입장으로 다수의 취향을 관찰한 사람으로서 말하는 데 소수가 다수가되고 다수가 소수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러니 혹시 어디에도 속한 것 같지 않아 내가 조금 이상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여전히 가끔은 내 취향이 외면당하고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요즘 인기라는 다수들의 삶을 훔쳐보기도 하고 궁금해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나 자신의 독특한 취향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가 들고 혼자인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