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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굴꾼 Oct 01. 2024

11. 빈 베토벤 파스콸레티 하우스에 가다

'악성' 루트비히 판 베토벤 (출처:위키피디아)

루트비히 판 베토벤. 하일리겐슈타트 박물관에서 베토벤에 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해버린 바람에 이번 글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음, 이번에는 베토벤의 음악이 어디에 쓰였는지를 이야기해 보자.


베토벤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작곡가 가운데 하나다. '니나니나니고릴라야'로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는 고릴라뿐 아니라 학원 차 후진송으로 무척 유명하다. 9번 교향곡 일명 '합창'은 EU의 국가(國歌) 기도 하다. 연합가라고 해야 할까나. 하지만 우리가 '베토벤' 하면 바로 연상하는 곡은 5번 교향곡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예능에서 절망을 표현하고 싶을 때 더 자주 쓰이는 곡이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5번 교향곡은 양면성을 띤 곡이었다. 


전쟁 중 적국의 노래는 금지되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BBC가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BBC는 바그너의 음악도 꽤 많이 틀었다.) 베토벤은 영토로 따졌을 때 독일 본 태생이니 연합국 입장에서 베토벤은 적국 작곡가였다. 하지만 베토벤의 5번 교향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선율인 '빠빠빠-빰'은 모스 부호로 V, 즉 빅토리의 첫 글자를 상징했고 이에 따라 전쟁 중의 연합국에서도 베토벤의 음악은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히틀러 또한 본인의 생일잔치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느 쪽이나 베토벤이 썩 달가워했을 것 같지는 않다. 


양면성을 가진 곡은 5번 교향곡뿐이 아니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는 처음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했을 때 승리를 상징하는 오페라 공연으로 사용되었다. 동시에 1945년 나치가 무너지며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연주되었던 곡 또한 피델리오였다. 내용만 놓고 보면 나치가 대체 왜 승리의 상징으로 피델리오를 공연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억울한 압제로부터 벗어나며 자유와 해방을 널리 퍼뜨리는 이야기인데 아무리 봐도 독일이 처음 오스트리아를 점령했을 때의 상황보다는 오스트리아가 해방되었을 때의 상황과 훨씬 잘 어울리는 오페라다.


오늘의 대본은 2차 세계대전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오늘의 무대는 베토벤이 피델리오를 작곡한 곳이다.


베토벤은 빈에서 약 30년을 살았다. 사람마다 추측하는 횟수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아무리 적어도 30번, 많게는 90번까지 이사를 다녔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 빈에서 베토벤 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마음을 먹었다 하면 몇십 개는 거뜬히 만들 수 있다. 천만다행으로, 어떤 면에서 빈은 자비롭게 베토벤 박물관을 두 곳만 만들어 놓았다. 하나가 앞서 갔던 하일리겐슈타트 박물관이었고 다른 하나가 파스콸레티 하우스다.


베토벤 파스콸레티하우스는 링슈트라세 바로 안쪽에 위치해 있다. 모차르트하우스만큼 도심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제법 도심인 셈이다. 링슈트라세는 내가 빈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로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대로를 따라 건축된 하얀 역사주의 건축물들이 말로 다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실 푹푹 찌는 날씨에, 지하철도 한 구간 잘못 내려서 국회의사당에서부터 한참을 걸어야 했지만 건축물들로 눈이 즐거워져서 불만은 딱히 없었다. 베토벤 파스콸레티하우스가 100m 남았을 때까지는 말이다.


지도를 봤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 있었다. 분명 직선거리로는 1분이면 도착하고도 남을 텐데 5분을 더 걸으라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인지 봤더니 아니 글쎄... 절벽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가파른 언덕 위에 집이 한 채 있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한 바퀴를 빙 돌며 계단 말고 다른 우회로가 없는지 절박하게 찾아봤다. 없었다. 눈물을 애써 참고 계단을 올랐다. 익숙한 빨간색 깃발을 보고 다 왔구나! 했더니 후문에 붙어 있는 청천벽력 같은 팻말, '베토벤 하우스는 4층에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유럽에서는 지상층 (Ground Floor) 개념, 즉 0층이 있기 때문에 안내문의 4층이라는 말은 곧 우리 기준 5층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5층,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잊고 살았던 높이였다. 이미 언덕까지 걸어 올라왔으니 정말 언덕 위에 있던 내 고등학교 교실을 걸어올라간 높이와 다를 바도 없는 셈이다. 엘리베이터, 그런 건 없다. 베토벤도 그런 것 없이 살았으니 현실체험이었다. 계단은 삐걱삐걱 거리고 나는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헐떡이고 있었다. 베토벤 그렇게 돈 없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로열층에 안 살고 하인들도 안 살 5층에서 살고 있냐 따지고 싶었다. '파리의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하면서 충격받는 외국 소개 프로그램들을 많이들 봤을 텐데, 파리만 없는 거 아니다. 오래된 동네에는 엘리베이터가 대체로 없다. 2022년 유럽 여행을 갔을 적에도 베를린 숙소가 엘리베이터가 없어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다니느라 된통 혼났고 2024년 교환학생으로 도착한 1월 베를린 숙소도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그렇다고 박물관까지... 그것도 5층이 박물관이면... 한숨만 푹푹 나왔다. 계단이 없다는 말을 뭐 이렇게 길게 하고 있냐 싶겠지만 그 박물관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 중 하나였단 말이다.

오르막길이 살짝 보이는가. 아, 또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하다. (출처: Wien Museum)

크기만 놓고 보자면 파스콸레티하우스는 슈베르트 박물관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다. 오디오 스테이션을 포함해서 관람할 수 있는 전시실은 총 네 곳이지만, 관람객 숫자는 슈베르트 박물관과 비교하기 민망할 수준으로 많았다. 10명 (지금껏 이 시리즈를 꾸준히 따라오신 분들께서는 10명이 얼마나 붐비는 박물관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넘게 그 작은 박물관을 관람하고 있었으니 베토벤의 명성이 체감됐다. 물론 링 안쪽 1구에 위치해 있다는 점도 큰 이점이었을 테다.


리뷰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직원이 불친절하다고 말하던데, 불친절했는지 불친절하지 않았는지는 기억이 없다. 옷을 덥게 입고 간 데다가 가뜩이나 체력도 없으면서 5층까지 기어올라간 시점에서 눈앞이 하얘져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첫 전시실에서 벽에 기대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 말고도 그러고 있는 사람이 두엇 있었다.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첫 전시실과 MD샵이 바로 나오는데, 따로 옷이나 짐을 보관해 둘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가급적 짐을 최소화해서 다니기로 한 스스로의 선택이 고마워졌다. 앉아서 물 한 잔을 마시고 하얘졌던 눈앞이 원래 색으로 돌아오고 천천히 구경을 시작했다.


파스콸레티하우스 또한 4개의 전시실에 각각 테마를 부여해 전시를 해두고 있다. 대부분의 전시품들은 동시대의 초상화나 판화, 문서들 또는 레플리카 악보나 편지들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방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더 많기 때문에 세 번째 방과 네 번째 방부터 이야기하겠다. 세 번째 방은 베토벤이 살아 있을 적 만들어진 단 하나의 흉상과, 그 흉상을 만들기 위한 자료로 활용되었던 라이프마스크를 전시하고 있다.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 박물관에서도 전시되어 있던 흉상이었다. 베토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다양한 초상화들에서 대체로 아래쪽으로 내려간 입꼬리와, 꾹 다문 입이 기억날 테다. 그 원본 마스크를 눈앞에서 바로 볼 수 있다. 제체시온 안내책자에서 보여줬던 베토벤 조각상의 모습도 떠올랐고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봤던 데스마스크도 떠올랐다. 몇 년도 초상화를 봐도 얼굴에 일관성이 있어서일까, 혹시나 베토벤이 부활하더라도 베토벤을 못 알아보고 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도 계란형보다는 정사각형에 가깝게 넓적하고, 코도 납작하고, 성깔도 더러워 보이고, 어딜 보나 얇고 세심한 면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얼굴이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산다는데-또는 사는 대로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어릴 적 상상하던 것에 비해 많이 못생겼다는 것을 빼면 베토벤의 삶에 완벽하게 걸맞은 얼굴 같다.

베토벤의 라이프 마스크. (출처: 이자벨라 스튜어트 가디너 뮤지엄)

앞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박물관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던가, 초상화는 원래 단순히 작곡가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작곡가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도구기도 하다고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런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모습에 비하면 베토벤 흉상이 보여주는 베토벤의 모습은 상당히 정직하다. 그런 이미지의 작곡가가 아닌 하이든조차 자신의 초상화를 너무 자신과 닮게, 그러니까 정직하게... 못생기게 그렸다고 화가에게 화를 냈다는 일화가 있는 것을 보면 이런 못생긴 흉상을 보고서도 자신과 닮았다고 좋아했다는 베토벤은 다른 건 다 몰라도 가식 없고 솔직한 사람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빈 귀족들 또한 베토벤의 이런 면모를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빈에 상경한 20대의 베토벤은 작곡가만큼이나 피아노 연주자로 유명했었는데, 이때부터도 베토벤은 이미 귀족들에게 수시로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다른 연주자와 피아노 배틀을 벌일 때마다 시선을 끌었었다. 더 이상 피아노 연주자로는 활동하지 않게 된 30대가 넘어서도 베토벤의 인생에는 후원자 복이 끊이지 않았는데, 의외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찢어지게 가난해서 밥 한 끼도 사 먹을 돈이 없는 천재' 이미지와 베토벤은 사실 그리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베토벤은 꽤 잘 살았다.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확산된 평등이라는 이념이 베토벤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작곡가의 지위가 베토벤 이전과 이후 크게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베토벤이라고 해서 후원자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작곡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전 하일리겐슈타트에서도 내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후원자들과 베토벤의 관계에 전시실을 하나 통째로 할애하고 있었고 이곳 또한 곳곳에 후원자들의 흔적이 묻어 있다. 파스콸레티하우스 또한 마찬가지다.


파스콸레티하우스라는 이름은 원래 이 집주인이던 파스콸레티 남작에게서 따온 것이다. 파스콸레티 남작은 1804년에서 1814년, 흔히 베토벤의 '영웅주의 시기'라고도 불리는 10년간 베토벤에게 내내 이 집을 빌려주었다. 그럼 베토벤이 계속 이 집에서 살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고, 베토벤은 이 집 저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다. 그래도 이 집에서는 제법 오래 지냈고 1804년에서 1808년, 1810년에서 1814년 이렇게 8년 정도를 보냈다고 한다. 집세가 공짜라는 합리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베토벤은 이곳에서 본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 등을 작곡했다. 오페라를 쓰고 싶어서 살리에리를 찾아가 배운 적이 있는 베토벤이었는데,  베토벤보다 30년 전 살리에리도 파스콸레티하우스 건물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로운 지점이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남작 부부는 이 집을 10년 내내 베토벤에게 빌려주었다. 베토벤이 파스콸레티하우스에 지내고 있지 않을 때도 언제든지 집을 쓸 수 있도록 관리를 시켰다고 하니 이 부부의 베토벤에 대한 애정은 가히 헌신적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루돌프 대공도 그렇고, 파스콸레티 부부도 그렇고 가만 놓고 보면 베토벤은 참 후원자 복이 많다. (물론, 헌정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후원자를 만족시킬 방법을 찾아낸 것도 맞는 것 같다.) 그 매력 가운데 하나가 흔한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당신 같은 작곡가는 처음이야!' 클리셰라고 해도 딱히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가식 없고, 솔직하고, 때로는 무례하며 막 나가기까지 하는 성격은 빈 귀족 사회에서는 쉬이 보기 힘든 것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분명 베토벤의 후원자 가운데 몇은 베토벤을 '얻기 어려운 희귀한 수집품, 희귀한 트로피'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는 진심으로 베토벤의 진중함과 신선함에 반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나조차도 베토벤의 그런 면모에는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하물며 19세기 귀족이었다면 어떻겠는가.


그런데, 그런 곳이기만 하면 참 좋았을 텐데 파스콸레티 하우스에는 어두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전시실에 들어가기 전에 붙어 있던 안내문인지 나오기 직전에 붙어 있던 안내문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안내문은 내게 모차르트하우스의 안내문에 이어서 다시 한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사실 파스콸레티하우스는, 베토벤이 살던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다. 왜냐하면 파스콸레티하우스는 원래 비유하자면 101호와 102호를 하나로 합친 형태의 집이었는데, 우리가 보고 있는 박물관 권역은 101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토벤은 102호에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편의상 102호로 지칭하고 있는 곳에는 현재 실제 세입자가 살고 있기 때문에 방문할 수 없다. 그럼 단순히 베토벤이 102호가 아니라 101호에 살았다고 착각을 했던 것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다. 내가 파스콸레티 하우스 안내문에 적혀 있던 내용을 본 바에 의하면 베토벤은 101호랑 102호 두 곳에서 모두 지냈다고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101호에 굳이 베토벤 기념관을 건립하게 된 이유는 꽤 투명했다.


베토벤 기념관이 이곳 5층 (유럽식 4층)에 건립된 것은 1941년이었다. 이 한 문장만으로 모든 것을 깨달은 독자분도 계실 것이다. 맞다. 이곳에는 유대인 가족이 살고 있었다. 1941년이면 독일이 파죽지세로 소련을 침공하고 있던 시기다. 이런 때 선전용으로 팔아먹기 가장 좋은 작곡가가 누구였겠는가? 딱 두 명을 고르자면 바그너와 베토벤이었다. 독일에서 유명한 작곡가들의 이름을 대강 대 보자면 바흐, 헨델, 베토벤, 멘델스존, 슈만, 바그너, 브람스 정도인데 이 가운데 헨델은 영국으로 귀화했고 멘델스존은 유대계 혈통이었으므로 선전에 적합하지 않은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위대한 작곡가라는 측면에서는 써먹기 좋았지만, 궁극적으로는 기독교를 없애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종교 삼고 싶었던 나치에게는 역시 부담스러웠을 테다. 그럼 슈만과 브람스는? 길다. 감상적이다. 한 번에 소위 말하는 '뽕'이 차오르지 않는다. 금관소리 빵빵하고, 영웅적인 승리의 음악을 쓰는 바그너와 베토벤! 그리고 바그너가 베토벤을 존경했으니 베토벤의 위상은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베토벤은 영웅이었다! 천재였고, 승리의 상징이었고, 독일 영혼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위인이 살던 역사적인 장소에 '열등한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나치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청소'의 시간이었다. 베토벤이 살던 곳이 맞았는지 아니었는지 확실치도 않던 파스콸레티하우스에서 쫓겨난 유대인 가족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파스콸레티 하우스의 구글 지도 평점은 슈베르트하우스보다 낮은 3.5점이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점수지만, '전시품이 그닥이었다' '너무 좁았다' '5층은 말이 안 된다' 등 낮은 평점을 준 이유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내 눈에 유독 밟힌 리뷰가 하나 있었다. '쫓겨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적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다뤄졌어야 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박물관이 화이트워싱당*한 느낌이었다'라는 이야기였다. 전시실이 네다섯 개뿐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가도, 앞서 베토벤의 흉상과 데스마스크를 제외하면 벽에 붙어 있는 그림 몇 점뿐이었던, 가장 큼에도 불구하고 공간이 낭비되었고 공활하기만 해 보이던 전시실을 떠올리자 그 리뷰에 동의하게 되었다. 


*화이트워싱: 원래는 유색인종이었던 인물을 백인으로 바꾸거나, 피부색을 밝게 바꿔 백인처럼 보일 수 있게 하는 일. 여기서는 소수자들의 역사를 지우고 다수의 역사로 덮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파스콸레티 하우스의 설명문.

베토벤이라고 해서 아주 깨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평범하게 유대인 출판업자들을 만나면 유대인 같다는 말을 쩨쩨하고 쪼잔하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했다. 그 시대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반유대주의였다.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적의를 보인 적은 별로 없다. 베토벤이 유대인을 욕설로 사용하면 보통 유대인 출판업자와 얽혀 있는데, 유대인이라서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냥 본인이 원하는 값을 못 받아서 화가 나 있는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베토벤이 본인 기념관을 만들겠다고 멀쩡하게 살아 있던 유대인 가족들을 쫓아내는 걸 반겼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베토벤은 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착한 사람이라지만, 난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옳으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빈에서 베토벤은 아무리 적어도 30곳이 넘는 곳에 살았는데, 그중 딱 하나를 골라서 멀쩡히 살고 있던 사람들을 쫓아낸다라, '위대한 작곡가를 기리겠다'는 변명을 통해 감춰진 불순한 의도가 빤히 보인다. 위선이다. 편협한 국수주의다. 그의 오페라 '피델리오'만 해도 억울하게 감옥에 가둬진 남편을 구하는 아내의 이야기인데, 베토벤을 기리려면 그가 살았던 집과 같이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가 꿈꿨던 미래와 그의 이상을 기려야 했다. 당사자들이 더 이상 세상에 없으니 과오를 바로잡을 수도 없다.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 공연 장면. 사실 너무 교훈적이기만 해서 그리 좋아하는 오페라는 아니다. (출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첫 번째 전시실로 돌아가서 베토벤의 서랍장, 시계, 후추통과 보면대를 다시 한번 바라본다. 누군가의 가구는 창밖으로 가차 없이 던져졌거나, 불에 태워졌거나, 헐값에 팔렸을 텐데 누군가의 가구는 이렇게 소중히 보존되어 유리케이스에 넣어져 있다는 것이 참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작곡가가 가지고 있던 가구를 보면 생전 처음 놀이공원에 가는 아이처럼 신이 나는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베토벤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역사 속 지워져 버린 유대인 가족의 이야기가 조금은 더 있었어도 좋았을 것 같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가면 종종 마주하게 되는 어두운 흔적의 이야기는 후일 바이로이트에서 더 자세히 하도록 하겠다.

베토벤의 보면대.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 박물관, 슈베르트 생가, 하우스 오브 슈트라우스, 베토벤 파스콸레티하우스, 그리고 슈베르트가 죽은 집까지 이날 총 다섯 개의 박물관을 방문하고 나니 체력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평생 볼 작곡가 박물관은 다 본 기분이었다. 하루에 같은 테마의 작곡가 박물관 다섯 개를 본다는 건 돈을 아낄 수 있는 일이긴 했지만 질리는 일이기도 했다. 이쯤 됐으면 여러분도 슬슬 빈에 질리지 않았을까 싶다. 천만다행으로 이번 편이 빈 기행은 마지막이다. 또 빈에 가라고 하면 갈 것이냐고? 당연히 갈 것이다. 하지만 빈 작곡가 박물관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쓰고 싶다. 파파 하이든, 왈츠의 왕, 가곡의 왕, 신동, 악성에게 작별을 고하자.


아, 생각해 보니 완전한 작별은 아니다. 아직 모차르트랑 베토벤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조금 남아 있다.


최종평가

명칭: Beethoven Pasqualatihaus
운영시간: 화~일 10:00~17:00, 12:00~13:00은 휴식시간
입장료: 성인 5유로, 할인가 4유로
사이트 링크: WIEN MUSEUM - Beethoven Pasqualatihaus

1. 도시 접근성: ★★

빈. 드디어 다음번부터는 다른 도시로 이동하니 이 5점도 잠시 안녕이다!


2. 도시 내 접근성: 

링슈트라세에 있지만 완전 도심이라 부르기는 애매하고, 중심부에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여기까진 큰 문제가 아니지만 역시 박물관이 언덕 위, 그것도 5층에 위치해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다면 접근성을 3점 이상으로는 줄 수가 없다.


3. 소장품: ★

앞서 너무 쟁쟁한 박물관을 많이 봐서 그런가, 조금 아쉬운 감은 있다. 그래도 문짝까지 뜯어와야 했던 하일리겐슈타트 박물관에 비하면 베토벤이 소장했던 가구들이 몇 개 있어 아쉬움은 없었다. 베토벤의 양념통, 베토벤이 쓰던 보면대, 베토벤의 서랍장과 베토벤의 시계, 그리고 데스마스크와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이외는 베토벤과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소장품들이거나 레플리카다.


4. 언어 지원: ★★★

앞선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 박물관, 하이든하우스와 동일하게 영어 완역이 되어 있다. 2019년 리뷰에는 모든 전시가 독일어여서 아쉬웠다는 내용이 있는데 2024년에는 영어 번역이 다 되어 있었다.


5. 가성비: ★★☆

5유로 정도의 가격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장품이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가성비가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베토벤 흉상을 전시하고 있는 전시실이 공활하다 말해도 좋을 정도로 텅 빈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아깝다'는 생각도 잠깐 머릿속에 스쳤다.


6. 규모: ★★

관람하는 데 넉넉잡아서 30분이 걸렸다. 오디오스테이션에서 음악까지 들었는데도 말이다. 5칸이었으니 상당히 작다. 그래도 슈베르트네보다는 볼 것이 많았다. 설명도 나름 열심히 적어준 것 같았다.


7. 상호작용: ★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스테이션이 있다. 사람이 꽤 많은 편이라서 두 칸뿐인 오디오스테이션 자리를 차지하기는 어렵다. 직원분이 오고 가기 때문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눈치도 좀 보인다.

베토벤 파스콸레티하우스의 오디오 스테이션.


8. 굿즈: ★★

샵 규모가 작고 품목도 하일리겐슈타트에 비해서 적다. 그러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붙어 있던 말도 안 되는 프리미엄이 사라진다. 이곳에서 곰돌이를 7,500원 가까이 더 싸게 살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아직도 속이 끓는다.


9. 큐레이팅: ★★★

전체적으로 무난했지만, 쫓겨난 유대인 가족을 생각하면 그들을 더 다뤄주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베토벤에 대해 내가 궁금했던 부분을 많이 다루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3점을 주었다.


10. 총평: 

무척 애매한 박물관. 하일리겐슈타트까지 갈 시간은 없는데 베토벤은 궁금하다 하는 사람을 위해 있는 곳 같다.

최대 장점: 음... 애매한 사람들을 위한 틈새시장 공략이 장점이라면 장점 같다.

최대 단점: 명성에 비해 너무 작은 규모와 다시는 가고 싶지 않게 하는 5층이라는 무시무시한 층수

추천 여부: X


아래에는 베토벤 파스콸레티하우스의 영상을 첨부한다.


12화 예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 또 베토벤이냐 화내지 말아 주시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빈이 아닌 본이다! 화사한 벚꽃이 흐드러지게 흩날리는 그곳, 분홍빛 베토벤 생가가 있는 그곳, 리스트가 건립한 베토벤 동상이 있는 그곳! 앞선 두 곳에서 '원본: 본 베토벤 박물관 소장'이라는 글귀를 볼 때마다 기대감이 높아갔던 그곳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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