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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굴꾼 Sep 24. 2024

10. 빈 하우스 오브 슈트라우스에 가다

왼쪽부터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 위에서부터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요제프 슈트라우스,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출처: Vermont public)

슈트라우스 가문. 그들이 귀족은 아니지만 왈츠의 혈통을 따진다면 이 사람들은 진골도 아니고 성골귀족일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저번에 이미 이야기했으니 넘기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은 매년 빈 황금홀 신년연주회의 마지막을 장식할 정도로 아이코닉한 곡이며 차남 요제프 슈트라우스도 '천체의 소리 왈츠' '사랑의 진주 왈츠' 등 명곡을 많이 남겼다. 막내 에두아르트는... 음,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곡이 없으니 형들에게 열등감을 느낄 만했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영향을 주고받고, 때로는 선의로 때로는 악의로 경쟁하면서 빈의 무도회장을 제패한 네 명의 슈트라우스! "슈트라우스 왕조"라는 TV 드라마 시리즈가 있을 정도로 이들은 빈에서 사랑받는 존재였다.


빈! 또는 비엔나! 이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비엔나소시지? 비엔나커피? 비엔나 협약인 사람도 있을까? 다 정답이겠지만, '비엔나'라는 단어를 들으면 내가 가장 먼저 연상하는 것은 '비엔나 왈츠'다. 비록 지독한 몸치라서 신해철의 '그대에게' 치어리딩 하나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내 취미 중 하나는 영국 BBC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인 'strictly come dancing'의 춤추는 영상 찾아보기일 정도로 춤에 관심은 있다. 스탠더드, 라틴, 스윙 속에서도 유독 빛나는 춤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비엔나 왈츠다.


비엔나 왈츠의 특징은 빠른 박자와 끊임없는 회전이다. 현대 댄스스포츠에서 스탠더드 댄스를 출 때 여자들이 입는 구름처럼 풍성하고 나풀거리는 드레스들은 비엔나 왈츠의 끝없는 회전에서 그 진가를 발한다. 돌고, 돌고, 돌고, 어지럽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돈다. 19세기 유럽은 왈츠의 열병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한가운데 있던 인물은 베토벤도, 브람스도, 차이콥스키도 아닌 요한 슈트라우스 2세였다. 앞서 방문한 박물관의 작곡가들은 콘서트홀에서 몇 번 들을까 말까 한 음악이었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은 정말 그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살아 숨 쉬던 음악인 셈이다. 때문에 1957년 블라디미르 페루루빈스키의 그림 "비엔나 왈츠" 에는 전형적인 왈츠를 추는 19세기 후반의 신사숙녀들에 더불어 그림 오른쪽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무도회장에서 힘차게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블라디미르 페루루빈스키, '비엔나 왈츠 (1957)'. 오른쪽에 약장을 달고 지휘하는 슈트라우스의 모습에 주목하라. (출처: Tutt'Art)

1899년, 요한 슈트라우스의 끝은 곧 구시대와 19세기의 끝이기도 했다. 그 속이 어떨지는 몰라도 가장 융성하고 화려하던 시대, 풍족하고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사람의 향수조차 건드릴 수 있는 사치와 향락의 시대를 어찌나 잘 상징했는지 이후로도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9세기에 대한 향수나 구세대의 답답함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슈트라우스 집안이 말이다. 우리는 보통 슈트라우스라고 하면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떠올리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비록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동생 요제프 슈트라우스, 그리고 또 다른 동생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유명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로 인해 자연스럽게 왈츠를 접하게 되었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과로로 쓰러졌을 때 요한 슈트라우스의 자리를 대신해 준 요제프와 에두아르트 덕분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지금의 명성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슈트라우스 가문의 자손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고손자,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와 그 손자 분 토마스 슈트라우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는 것은? 몰랐을 만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박물관인 하우스 오브 슈트라우스는 2023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198번째 생일, 다시 말해 10월 25일에 개관해 아직 세워진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우스 오브 슈트라우스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알고 있었고 기대가 컸다. 난 체험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슈트라우스 2세의 곡을 몇십 번씩 반복재생하며 마트도 열지 않고 사람도 없는 한산한 거리를 그리 신나게 걸어가는 사람은 아마 그 동네 사람들에게 꽤 희귀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하우스 오브 슈트라우스는 19세기 당시 카지노가 있던 자리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데뷔 무대가 카지노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적절한 선택이다. 실제 슈트라우스가 공연한 적도 있는 카지노였으니까 더욱 적합하다 볼 수 있겠다. 지금도 카지노의 정신을 이어받아 카지노와 레스토랑, 매우 규모가 큰 기념품샵이 운영 중이다. 당시 카지노의 콘서트홀도 관리 소홀로 인해 노후화되었으나 이제 복원작업을 거쳐 레코딩홀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빠른 시일 내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복원된 카지노 내부. (출처: Meeting Destination Vienna)

1층 입구에서 바로 숫자로 보는 슈트라우스 일가 이야기가 나온다. 서쪽으로는 영국, 동쪽으로는 러시아까지 종횡무진하는 슈트라우스 일가. 아버지와 아들 셋은 모두 음악계 종사자. 벌어들인 수익, 공연 횟수, 쓴 곡 숫자 모두 셀 수 없음. (요한 슈트라우스 2세만 해도 400곡이 훌쩍 넘는다.) 슈트라우스 박물관에서는 매 30분마다 (정시마다였나?) 미디어관에서 버추얼 콘서트를 해주는데, 내가 갔을 때는 버추얼 콘서트가 끝난 직후라서 아직 관람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박물관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하우스 오브 슈트라우스 2층에 올라가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테마파크 같다"였다. 이곳을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고민이 됐다. 보통 박물관 하면 하얀 벽이나 검은 벽을 상상하게 되는데, 붉은색, 보라색, 분홍색, 초록색, 파란색... 총천연색의 벽에 바닥 또한 체크무늬 타일 바닥이 깔려 있었다. 확실히 내가 생각한 통상적인 박물관은 아니었다. 눈이 돌아가는 색의 향연이었다. 그 색의 향연에 나는 놀이공원에 처음 와 본 어린아이처럼 흥분과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흠, 박물관이 보통 이런 느낌이었던가? (출처: Tripadvisor)

아래 지도는 하우스 오브 슈트라우스의 지도로, 각 방의 벽 색깔에 따라서 지도가 구분되어 있다. 슈트라우스 가문 일대기를 설명해 주는 붉은 벽의 방, 왈츠의 발달사를 설명해 주는 분홍색 벽의 방, 세 명의 슈트라우스의 일생을 설명해 주는 파란 벽의 방, 슈트라우스들과 다른 작곡가들을 설명해 주는 초록색 벽의 방... 어떤 것을 전시하고 있는지는 아래 지도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번역하자면,

1)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탄생. 2) 19세기 빈의 삶. 3) 4명의 천재, 그들의 삶과 작품. 4) 대작곡가들의 슈트라우스 평가. 5)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극장을 정복하다. 6) 맥박-당신만을 위한 왈츠. 7) 한 시대의 유산. 8) 카지노의 역사. 9) "푸른 도나우 왈츠"의 역사. 10) 무도회장-멀티미디어 슈트라우스 공연. 이렇게 10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이야기는 2층에서 확인할 수 있다. 2관에는 커다란 왈츠 추는 남녀 석고 모형이 있고, 영상으로 왈츠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클래식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슈트라우스만큼 유명한 경음악 작곡가(들)를 찾기란 불가능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일생은 춤과 떼어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한국 문화권에서 왈츠를 비롯한 무곡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현대의 한국인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다. 한국에서 춤은 '모든 사람이 추는 것'이 아니라 '공연자들이 추는 것'으로 생각되곤 했으니 말이다. 탈춤이나 궁중 연회의 춤곡 모두 행사에 참여한 사람과 춤을 추는 사람이 구분되어 있다. 고려까지 올라가면 상황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강강술래조차도 모든 사람이 참여하나 출 수 있는 시기는 추석, 대보름으로 한정되어 있다. 신명 나는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춘다고 해도 그 춤이 형태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 춤인 경우는 적다. 특히나 사교생활과 무용이 관련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에 반해 서양의 춤은 훨씬 대중적이었다. 형태가 규정되어 있었고, 사교 기능이 차지하는 비중도 훨씬 크다. 오늘날에조차 서양의 파티 문화는 동양에 비해 훨씬 활성화되어 있고 영화를 보면 모든 사람들이 파티에 입고 갈 만한 드레스 두어 벌은 옷장에 갖고 있다. 하물며 19세기에는 어땠겠는가? 서양의 무도회는 잘 알려져 있듯 젊은 숙녀들이 남편감을 찾는 자리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였으며, 유행을 점검하고, 가십을 생산하는 장소기도 했다. 춤을 몇 차례, 누구와, 어떤 곡을 추었는지에 따라 호감의 정도를 계산해 볼 수도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로맨스 판타지물'에서 무도회가 매번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서양 사교생활의 필수품과도 같던 이 무도회의 뒤편에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가 있었다. 이 넷은 무도회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무도회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슈트라우스들은 매일 저녁 무도회가 열리는 집을 자신의 관현악단을 끌고 찾아다니며 왈츠를 연주했다. 무도회가 하루에도 여러 집에서 열리는 만큼, 그들도 하루에 다섯 곳 이상의 장소에서 무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아직 녹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존재했더라도 음질이 형편없던 시절-악단이 없으면 무도회는 시작할 수 없었다. 그들은 빈에서 가장 '핫한' 사람들이었다. 언제나 유행의 최전선에 서 있어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버려지는 위치의 위태로운 프리랜서들이었다. 무도회가 늘어난다는 것은 더 바빠지고, 경쟁자들은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슈트라우스 집안은 과로가 내력인 것처럼 일했다. 슈트라우스 1세는 쉴 새 없이 일했고, 오스트리아에서 영국까지를 아우르며 유럽 전역을 종횡무진 투어했다. 쓰러졌지만 쓰러지고 나서 또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갔다. 결국 과로로 인해 면역력이 이미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자녀들에게 병이 옮으며 사망하고 말았다. 슈트라우스 2세는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평생 병과 죽음에 대한 비정상적인 공포를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트라우스 2세 또한 하루에 다섯 탕씩 무도회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하다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쓰러져 버리고 만다. 이에 슈트라우스 집안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형제 둘, 그리고 어머니) 은 비상대책회의를 열었고 그 빈자리를 둘째 요제프와 셋째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가 잠시 대체하자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렇게 요제프와 에두아르트도 원래 직장을 떠나 음악계에 종사하게 되었다. 3관에서는 이 4명의 슈트라우스들이 어떤 일생을 살았는지를 그들의 궤짝을 열어두는 형식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일부 설명이 독일어로만 적혀 있고 영어로 적혀 있지 않아 아쉬웠지만 이들의 삶을 대략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3명 각각의 삶을 미리 알고 온다면 훨씬 이해가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천재의 하루를 알아보자'라는 코너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했을지를 직접 시간을 분배해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 코너에 따르면 슈트라우스 2세가 하루에 잔 시간은 5시간에 불과했다. 어떻게 하루 5시간을 자면서도 70살을 넘게 살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일과를 직접 시간배분해 보는 콘텐츠.

4관에서 슈트라우스와 다른 작곡가들의 관계를 가볍게 살펴 주고-슈트라우스 2세와 1세는 경음악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작곡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다-5관으로 넘어가면 요한 슈트라우스의 인생 후반을 지배했던 '오페레타'가 나온다. 오페레타는 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가벼운 오페라에 해당하는 극으로, 슈트라우스는 평생 수많은 오페레타를 시도했지만 '박쥐' 하나를 제외하면 다들 미적지근한 반응을 거두었다. 5관에서는 오페레타 중 유명한 극 몇 장면에 내 얼굴을 합성해 볼 수 있는 콘텐츠가 있는데, 나는 '박쥐' 중 'Du und Du'를 체험해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두 명이서 부르는 듀엣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 갔다면 상대역은 얼굴이 비어 있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역시나 아쉬웠다. 하지만 친구와 함께 가게 된다면 웃는 표정, 입 벌린 표정 등 다양한 표정을 합성해 주는 영상을 보고 친구와 함께 실컷 웃고 나올 수 있다. 내 얼굴이 나오는 바람에 이 부분의 영상을 올릴 수 없음이 아쉽다. 이어서 바로 다음 관은 복도에 있는 미니 코너로, '당신의 심박수를 측정해서 당신에게 어울리는 왈츠를 알아보세요!' 다. 화면에 손을 올리고 기다리면 심박수를 측정해 주고, 국적과 '당신이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선택지에는 여행, 사랑, 파티 등이 있었다)를 골라서 가장 적당한 곡을 추천해 준다. 피치카토 폴카부터 시작해 샤츠(Schatz) 왈츠까지, 메이저 한 곡부터 마이너 한 곡까지 나오니 한번 시도해 보고 QR코드를 공유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오페레타 장면에 내 얼굴을 합성해 볼 수 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왈츠 심리테스트 느낌이다.

7관에서는 주로 슈트라우스 사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다룬다. 슈트라우스의 인기를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되는 관이다.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독일 정부는 멘델스존이나 쇤베르크, 말러, 오펜바흐 등 유대계 작곡가들의 곡 공연을 금지했다. 그러나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유대계적인 외모라는 묘사에도 불구하고 금지당하지 않았다. 나치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가계도를 추적해 본 결과 그에게는 8분의 1 정도 유대계 혈통이 섞여 있다. 문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곡은 사기 진작에 최고였다는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곡으로 지친 심신을 위로받고 있었고 그 프로포간다는 나치로서도 쉽게 포기하기 힘들었다. 결국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혈통은 나치도 무시하고 넘어가는, 그 기준이 얼마나 자의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어버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은 단순히 향락적이거나 순수 예술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음악은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사회적이다. 그 점은 9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 미디어스테이션에서도 등장한다. 우리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를 기악곡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원래 도나우 왈츠는 합창곡으로 지어졌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도나우 왈츠의 가사다. 가사는 대략 아래와 같다.

"비엔나 사람들이여, 행복하라!" "오호라, 행복할 이유가 있나?" "주변을 둘러보시게나!" "행복할 이유가 있냐느니까?" "빛 한줄기가 들어오는구나!"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만." "사육제잖은 가!" "그래 그래서 어쩌란 말이고?" "그러니 이 시절과 정반대로-" "아 주여, 이 시절이라!" "이 슬픔의 시절과 반대로 하라." "그거 좋은 생각이구려!" "후회하고 애도해야 무엇하리, 그러니 행복하고 경쾌하자! 사육제의 법을 따라, 호주머니 사정이 아무리 빈곤할지라도, 춤추자꾸나! 오늘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무도회의 춤꾼들만큼이나 땀 흘리리! 하도 사정이 어려우니 농부는 앉아서 가만 긁고만 있고, 결국 빚을 돌려 막기로 해서 세관에 가 세금을 내네. 돈이야 분명 사라졌지, 돈을 가지고 떠나는 일은 영영 없으리, 자 이제 사육제 기간이라 마을 여관에 무도회가 열려 예쁜 아가씨들이 모였으니, 떠들썩한 무도회는 있잖나-돈은 없을지라도. (중략) 그러니 쉬지 않고 계속해서 춤추고, 순간을 즐기기를, 행운이 다시 돌아오는 일이란 없으니까. 오늘 손에 있는 것은 전부 다 써버리자,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고 즐거움이라는 장미는 시들어 버리는 법이니까! 그러니 춤추고, 또 춤추자! (1867년 버전 가사, 자체번역)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와는 다소 다른 내용이다. 가사는 전혀 아름답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암울하기까지 하다. 1870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해 가벼워진 주머니도 주머니였지만, 무너진 자존심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또한 오스트리아에 살면서 이런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비록 본인의 주머니는 한 번도 얇아진 적 없었으나 시민들의 분노와 울분, 좌절감과 무력감을 캐치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바로 그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곡을 쓴 것이다. 이후 84년 가사가 바뀌었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반쯤 오스트리아 비공식 국가로 인정받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누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에 이런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까? 슈트라우스들의 곡은 지극히 사회적이고, 이슈와 트렌드에 가장 민감하게 응답하는 음악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혁명 행진곡'은 1848년 혁명에 동조하는 의지를 담고 있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1867년 전쟁에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는 노래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태어난 지도 200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날에 그 의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 음악과 음악에 담긴 감정만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정시가 되어 콘서트홀로 이동하면 요한 슈트라우스 2세로 분장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곡들을 연주하는 영상이 재생된다. 매 시간 진짜 공연을 기대했었기에 조금 아쉬웠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매 시간 또는 매주 실제 공연을 해주는 작곡가 박물관들이 있다.) 그러나 편집이 굉장히 내 취향인, 왜, '힙하려 애쓰는 21세기 교과서/교양서' 있잖은가, 그런 방식으로 되어 있어서 15분 내내 웃으면서 봤다. 다른 작곡가 박물관이었으면 살짝 눈살을 찌푸렸을지도 모르겠지만 하필 작곡가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작곡가이자 엔터테이너였기에 적절 특히 트리치 트라치 폴카가 나올 때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정말 대단해!' '러시아에서도 불렀다던데?' 같은 말들을 배경에 페이스북 메시지처럼 띄워주고 있어서 웃다가 죽을 뻔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곡이 15분 동안 무제한 메들리로 나온다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콘서트홀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세 명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은 공간을 절대 비게 하지 않았다.

참 MZ한 박물관이다.

여러분께서 몇 화 전 내가 던졌던 질문을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는 왜 그 오랜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았는가? 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곡은 여전히 흥을 돋우고 우리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3주가 지난 지금, 내가 나름대로 내놓은 답을 여기 짤막하게 적어 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은 모든 유행가가 그렇듯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렇다면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도 시대의 파도에 휩쓸려 멀리 먼지 덮인 역사책 속에 묻혔어야 했을 같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7화에 올렸던 내용이 떠오르는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사람들과 함께할 가장 빛난다는 말이다. 경음악이라는 것은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성공한다. 그러나 시대의 요구에 민감하기만 해서는 강물 위에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흘러가버릴 뿐이다. 중요한 것은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많은 클래식 작곡가가 '선구자' '혁명가' 등으로 불리며 뚝심 있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 물론 멋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우리를 등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천재들이 아니라, 멈춰 서서 우리가 힘들고, 슬픈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봐줄 이야기꾼이 필요하다. '무게 있는' 클래식 작곡가들은 종종 대중을 잊고, 경멸하며, 필요악 취급한다. 그들은 대중을 청자로서 필요로 한다. 그러나 대중 또한 살아 숨 쉬던 하나하나의 사람들이었고, 때로는 화자의 위치에 서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노래해 줄 음유시인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람들 없이는 없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노래해 주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자리에 있었다.


슈트라우스 2세는 자신의 음악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제공했으며, 사람들이 슬픈 이유를 듣고 그들을 위로한 뒤 훌훌 털어버리라 격려해 주었다. 빈 사람들에게는 꼭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시대가 지났지만 사람들의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 천재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음유시인이 이야기를 노래해 줬으면 좋겠다는 가지 욕망은 그대로다. 나도 마찬가지다. 작곡가들의 확고한 스타일이나 신념이 좋다 생각하면서도 쉽고, 직관적이고,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을 같은 음악이 듣고 싶다. 기쁜 일을 함께 기뻐해주고 슬픈 일을 함께 슬퍼해주는 것, 그것은 유명 클래식 작곡가들의 음악 중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그가 들어준 이야기는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지만, 멋들어진 음유시인이 나처럼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있다 생각하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없다. 그래, 나는 천재와 영웅에게 존경과 경외를 바친다. 그러나 음유시인에게는 사랑을 바친다. 사랑이라는 것은 때로 존경과 경외보다도 강력해서, 존경받는 자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깎아내리는 일은 가능하지만 사랑받는 자를 미움받게 만드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렵다. 슈트라우스 일가의 노래가 나치를 이긴 것은 그리 보면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토록 대중과 가까이 지낸 작곡가의 힘은 무서운 것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는 대중이 필요했고, 대중에게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필요했다. 그의 모토였던 "바꿀 수 없는 것을 잊는 자는 행복한 법"이라는 말은 그 당시 대중들에게 무엇보다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물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지만, 분명 바꿀 수 없는 것을 잊는 자는 행복한 법이다. 그것이 옳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반추를 상습적으로 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200% 더 높다는 연구결과를 보면... 슈트라우스의 조언은 21세기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말이다. 언제나 영웅처럼 살 수는 없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망각이 필요하다. 망각으로 괴로움에서 도망치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도 내리지 않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는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밖에 없던 것이라 생각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을 잊는 자는 행복한 법이라고 하니,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가운데 바꿀 수 없는 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들으며 음악 속 흘러가는 도나우 강의 물결에 그 고민은 흘려보내고 행복해지자. 왈츠여, 영원하라.


최종 평가

명칭: House of Strauss (하우스 오브 슈트라우스)
운영시간: 10:00~18:00, 월 휴무
입장료: 성인 23유로, 할인가 18.6유로
사이트 링크: House of Strauss

1. 도시 접근성: ★★

빈. 아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만큼이나 여러분들도 슬슬 다른 도시로의 이동을 바라고 계실 텐데, 12편부터는 드디어 빈을 벗어나게 될 테니 조금만 더 참아주시기를 부탁드린다.


2. 도시 내 접근성: ★★☆

슈베르트 박물관보다는 도시 안쪽으로 들어오긴 했으나, 중심부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과거 카지노가 있어서 유동인구가 많은 유흥가였을까 싶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저 드문드문 마트와 생활감 가득한 가게들만이 보이는 곳이 되었다.


3. 소장품: ☆

애초에 소장품을 기대하고 간 박물관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두 개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없다. 전시품 없다는 걸 딱히 숨기려는 생각도 안 하는 것 같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시대에서 오긴 했지만 소장하고 있던 물품이나 사진, 포스터 등은 없다. 전부 해당 자료들의 사진을 프린트해서 붙여놓은 느낌이다.


4. 언어 지원: ★★★

전체적으로 무난했다. 입구에서 QR코드를 찍으면 오디오 가이드가 활성화되는데, 어플도 따로 있었으니 다운받아서 가이드를 들으면 된다. 텍스트도 대부분 독일어와 영어가 병기되어 있어서 보기 편한데, 다만 위의 미디어스테이션에서 각각 궤짝을 열어 인생사와 각 슈트라우스들 인생 키워드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체험전시 부분만 영어-독어 지원에 약간 문제가 있는지 일부 부분이 번역되지 않은 상태다.


5. 가성비: ★★

웬만하면 더 높이 주고 싶었다. 사실 체험형 전시와 디스플레이해야 하는 미디어가 많을수록 관리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이 박물관은 빈 정부에서 지원을 해줄 것이 분명한 다른 빈 박물관들과 달리 사립 박물관이니까 가격을 높이 책정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는 있다. 그러나... 그건 그렇긴 한데... 알고는 있지만... 23유로는... 그러니까... 5유로짜리 박물관을 다니다가... 23유로... 박물관 하나에 3만 5천 원이라니... 이건 너무 비쌌다. 할인을 받아 18.4유로로 들어갔지만, 머리에서는 가격이 납득이 가도 가슴으로는 가지 않았으니 2점을 준다.


6. 규모: ★★★★

단순 박물관이 아니라 레스토랑이나 카지노까지 포함하면 5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일단 박물관 자체로만 놓고 보면 딱 4점 정도 크기다. 체험형 전시가 많아서 실제 볼륨은 크기에 비해 더 큰 느낌이 든다. 모든 걸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나면 2시간 정도가 지나가 있다.


7. 상호작용: ★★★★★

사실 이 평가기준을 거의 이 박물관 하나 때문에 만들었다고 해도 된다. 어린아이와 가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체험이 준비되어 있다. 위에서 설명한 '내 얼굴로 만들어 보는 오페레타' '나한테 어울리는 왈츠는?' '천재 키우기' '슈트라우스 가족의 가방에는 뭐가 있을까?' '숫자로 보는 슈트라우스 가문' 등등... '시대를 반영한 왈츠' 코너에서는 '황제 왈츠' '혁명 행진곡' 등을 틀어볼 수 있는데 틀면 박물관이 떠나가라 그 음악을 틀어준다. 거의 내가 전세를 낸 채로 구경하고 있어서 나만의 돌비스테레오처럼 썼을 정도였다. 박물관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탈피한 테마파크형 체험 박물관이라서 상호작용 하나는 5점으로도 모자라다 하고 싶을 정도다. 아, 딥페이크인지 AI인지 기술을 사용해 슈트라우스가 눈을 깜박이고 미소 짓게 해주기도 한다.


8. 굿즈: ★★

지금까지 간 작곡가 박물관 가운데 최대 규모의 굿즈샵을 자랑했다. 아쉽게도 슈트라우스 박물관이지만 슈트라우스에 관한 굿즈는 절반이 채 안 됐던 것 같다. 슈트라우스 와인과 슈트라우스 러버덕이 있던 것은 기억나는데, 가격이 다 너무 비싸거나 슈트라우스와 관련 없는 물품들뿐이라서 규모에 비해 실망하며 나왔다.


9. 큐레이팅: ★★★★★

각 테마별로 전시 구성이 깔끔하게 나뉘어 있었다. 선형적으로만 가지 않고, 주변 작곡가들의 평가나 당시 시대적 상황과 맞물린 음악 등 여러 가지 테마로 다양한 곡을 소개해주고 있다. 거기에다가 방마다 벽 색깔이 달라서 보는 재미가 있기까지 하다. 영상과 체험을 적재적소에 재미있게 활용했다.


10. 총평: ★★★★

장단점이 확실한 테마파크.

최대 장점: 주제별로 잘 분류되어 있는 큐레이션과 다양한 종류의 상호작용 전시

최대 단점: 비싼 가격, 소장품 부재

추천 여부: △. 나처럼 체험을 좋아하고 이미 너무 많은 작곡가 박물관을 가서 살짝 지쳤다면 추천하지만, 체험형 전시에 흥미가 없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하우스 오브 슈트라우스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내부 (2층 한정) 영상을 첨부한다.


11화 예고: 다시 한번 베토벤. 정다운 빈을 떠날 시간이 멀지 않았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가 작곡된 집을 찾아가 빈에서의 마지막 날을 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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