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루트비히 판 베토벤. (출처: 위키백과) 루트비히 판 베토벤. 1770년 본에서 태어나 1827년 빈에서 죽은 독일의 작곡가. 그러나 사실상 35년을 빈에서 활동했으니 오스트리아 작곡가라고 착각해도 그리 이상치는 않을지 모르겠다. 대표작은 빠바바밤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교향곡 5번 '운명', 통학버스 후진음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엘리제를 위하여', '베토벤 바이러스'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이외 교향곡 3번 '영웅', 교향곡 6번 '전원', 교향곡 7번, 교향곡 9번 '합창'까지, 이 정도면 교향곡의 황제라 불러도 좋을 테다(그러고 보니 피아노 협주곡 5번의 부제가 '황제'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이나 현악사중주 '라주모프스키', '대푸가', 피아노 트리오 6번 '대공',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29번 '함머클라비어'에 '장엄미사'... 이대로 늘어놓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다. 새삼 다른 작곡가들에게는 많아야 다섯 개 정도 꼽히는 명곡이 베토벤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이 정도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흐는 음악의 구약성경이고 베토벤은 음악의 신약성경이다'라는 말이 있듯, 베토벤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절대적인 존재 가운데 하나다. 동시에 내가 이 클래식의 마굴에 빠져들게 해 준 작곡가기도 하다. 악성(樂聖)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성이긴 하다.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울 때도 그나마 가장 재미있게 쳤던 곡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3악장이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앞의 소나티네나 모차르트를 칠 때는 참 재미없다 생각하다가 베토벤으로 오니까 확실히 살만해졌다 생각했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교향곡도 잘 듣는 어른이 됐다. 나는 베토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클래식 작곡가의 음악을 넘어 그 사람을 궁금해했던 것도 베토벤이 처음이었다. 운명을 극복하는 모습은 영웅적이었지만 나는 그 영웅 너머의 사람이 궁금했다. 어릴 적 읽은 위인전에서는 많은 사실을 숨기고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처음 인간으로서 마주하게 된 베토벤은 너무나도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랬기에 내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베토벤은 각별한 작곡가이다. 이제는 베토벤을 좋아하는 마음은 조금 식어버렸지만, 여전히 유럽 여행을 와서 무덤을 제외하면 처음 보는 베토벤과 관련된 장소라는 생각을 하니 기억 속에 묻어둔 지 오래된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가는 베토벤 박물관이 하일리겐슈타트라니. 그 유명한 유서가 써진, 베토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그 장소라니. 그때는 전날 너무 지친 바람에 아무 생각도 못 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설레는 기억이다.
4월 7일, 2024년 4월의 첫 번째 일요일이었다. 알람 소리는 따로 들리지 않았지만 이미 길어진 해에 눈이 번쩍 떠졌다. wien museum, 즉 앞서 하이든과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박물관을 운영하는 주체는 매달 첫 번째 일요일 자신들 산하 박물관을 무료 입장할 수 있게 해 준다. 내가 미리 짜 놓은 계획에 따르면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박물관은 하일리겐슈타트, 빈 19구 권역의 베토벤 박물관이었다. 사람도 많을 것이 뻔하고 거리도 멀 테니 오픈런을 뛰자는 생각이었다.
하일리겐슈타트로 가는 일요일의 트램은 한적했다. 하늘은 푸르렀고 햇살은 맑았고 나무는 싱그러웠다.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 트램에 타 있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한두 명뿐이었다.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의 유서가 없었더라면 이름을 들어 볼 일 없는 동네였다. 베토벤 박물관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하일리겐슈타트가 빈이랑 그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기분전환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서울 외곽 정도 나가는 기분이었던 거다.
독일은 일요일에 모든 곳이 문을 닫는다. 오스트리아도 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튼 하일리겐슈타트에는 한적한 일요일 오전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 박물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ㅁ자 모양으로 집이 안뜰을 둘러싸고 있다. 전통적으로 ㅁ자 구조는 한국에서 내실, 규방 등에 사용되는 폐쇄적 구조인데, 늘 다락방이나 계단 아래, 책상 아래처럼 좁고 숨겨진 공간에 로망을 가지고 있는 내게는 늘 편안함을 주는 구조기도 했다. 베토벤의 그 집의 어느 공간에서 지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아니 사실 베토벤의 생활습관이라면 같은 집에서 살다가도 다 뛰쳐나가겠지만-베토벤의 성격이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면 이런 폐쇄적인 구조도 안정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베토벤 박물관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15분, 박물관이 열리고서 15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이미 몇 명의 관광객이 보였다. 앞서 갔던 박물관 가운데서 나를 제외하고 사람이 다섯 명 이상 있거나, 나와 같은 전시관을 구경하고 있는 박물관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빈에서 50분 정도 트램을 타고 나와야 하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꽤 있음에서 베토벤의 위상이 가히 알 만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흔히 클래식 음악의 양대산맥으로 취급하지만 평범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을 때 모차르트보다는 베토벤의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베토벤 하일리겐슈타트 박물관은 6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6개의 전시관은 각각 서로 다른 테마를 다루고 있는데, Arriving, Rejuvenating, Composing, Earning, Performing, Bequeathing 이렇게 베토벤이 빈에 도착했을 때부터 하일리겐슈타트에 요양을 와서 자연을 느끼며 치유받는 과정, 작곡과 청력상실, 후원자와 지위, 공연, 그리고 베토벤이 남긴 유산 순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갔을 때는 정기 공연이 진행 중이었어서 5관 Performing 은 관람할 수 없었다. 혹시나 공연이 끝나고 나면 관람할 수 있지 않을까 박물관을 관람하는 한 시간 반 동안 열심히 주위에서 서성거려 봤지만 그런 행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베토벤이 본에 도착한 것은 격동의 시기였다. 베토벤이 1770년생이니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순회연주를 돌며 더 어리게 보이게 하기 위해 베토벤의 나이를 꾸며냈기 때문에 베토벤은 본인의 생일을 1772년으로 알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이십 대 청년으로 빈에 도착했을 때는 1789년 시작됐던 프랑스혁명이 유럽 전역에서 끓고 있을 시기였다. 앞서 봤던 작곡가 박물관들과 다르게 베토벤 하일리겐슈타트 박물관은 전시에 신경을 쓴 티가 확 났다. 심지어는 벽에 마차 문짝까지 매달아 줘서 빈에 온 베토벤의 기분을 생생하게 체험해 줄 수 있게 한다. 전시관 가운데에는 의자가 있는데, 이 의자 위에는 베토벤의 여행가방처럼 꾸며놓은 여행가방이 올려져 있다. 앉아서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 언제나 화려하고 융성했던 제국의 수도 빈에 온 베토벤의 기분이 느껴진다. 나중에 본을 가봤으니 하는 말이지만, 본은 벚꽃이 화려하게 펴 있는 축제 기간에 가도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중소도시 급이다. 그런데 한 강대국의 수도에 왔으니 얼마나 휘둥그레 해졌을까.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하면 수많은 사상을 만나고 부딪히면서 성장해 나가는 법이다. 더 넓은 세상, 더 깊은 생각,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새롭게 주어진 기회에 얼마나 놀랐을까. 대학에 오기만 해도 내가 알던 세상보다 넓은 세상이 있구나 하고 주눅이 드는데 하물며 베토벤이라면 어땠겠는가... 생각하다가도 베토벤이라면 또 그 특유의 자신감이 있었으니 주눅 드는 일 따위는 없었을지도 싶다.
베토벤 박물관 1관, 'Arriving' 전시실 내부. (출처: Vienna pass) 아마 그런 자신감이 맘에 들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빈 상류사회 사람들은 순식간에 베토벤을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모시며 여기저기 피아노 대결을 펼칠 때마다 환호했다. 베토벤이 원한만큼은 아니었겠지만 곡도 인정받고 있었다. 문제는 청력상실이었다. 아무리 자신감 넘치는 베토벤이라 하더라도 '운명의 장난' (너무 뻔한 표현인가?) 만큼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상실의 5단계라 부르는 과정을 베토벤도 거쳐갔을 테다. 소중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훨씬 소중한 것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으니. 처음에는 부정할 테고, 화도 내 보고, 어떻게든 타협도 해보려 하다가, 슬픔과 절망에 빠지나 결국에는 받아들이고 만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만 봐도 그가 느꼈을 감정이 한 번에 읽힌다.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 박물관의 특징은, 사실 소장품만 놓고 보면 그렇게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베토벤의 상황에 몰입하고 이입할 수 있는 공간이 잔뜩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흔히 베토벤을 클래식 작곡가 중에서 인간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작곡가라고 부르는데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기에 다른 박물관에 비해서 베토벤 박물관은 유독 관람객과 대상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주제로 전시하는 방은 아예 벽 전체가 소리를 흡수하는 판을 붙이고 있어 다른 방과는 분위기도 색도 판이하게 다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 가운데 거대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종이로 감싸놓은 베토벤의 책상 레플리카만이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난다. 책상 위에는 베토벤의 귀나팔이 또 레플리카로 올려져 있는데, 개별로 떼어놓고 봤더라면 '레플리카에 레플리카에 레플리카잖아!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 전혀 다른 의미의 층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묵직하게 다가온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에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원본이 없다는 건 아쉽지만 말이다.
베토벤 박물관은 다른 박물관에 비해 체험도 많고 음악을 들려주는 헤드셋도 많다. 하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전시물은-이번에 톡파원 24시였나, 랜선여행 프로그램에서도 다뤘는데-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시기별로 다르게 들려주는 건반이다. 헤드셋을 끼고 건반을 누르면, 왼쪽 베토벤의 청력이 멀쩡하던 때부터 1824년, 합창 교향곡을 초연하던 언저리까지 베토벤의 청력상실 정도가 들린다. 건반과 건반 사이에는 차이가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점점 물속에서 소리를 듣는 것처럼 곧 소리가 먹먹해진다. 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온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고 만다. 아마 나오는 음악은 베토벤의 비창 3악장이었던 것 같다. 베토벤의 청력상실이 한 번에 아예 들리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천천히 지나가는 과정임이 더 착잡하다. 어떻게든 진행을 늦추려고 기를 쓰고 몸부림치는 것이, 판도라가 상자의 바닥에 남겨두어 끝까지 인간이 잃지 못하는 그 알량한 한 가닥 희망에 매달리는 모습이 비참하다. 전시실 앞쪽에 있는 베토벤의 요양기법, 다양한 온천욕 방법, 의사의 조언 등등이 나와 있는 모습에서 베토벤이 얼마나 절박했는지가 느껴진다. 누구라도 그랬을 테다. 나였더라도.
청력상실 체험건반.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눌러댔으면 숫자가 다 벗겨진 걸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베토벤에게 '이대로 가면, 당신은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교향곡 가운데 하나 (9번 교향곡)과 수많은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악곡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력은 평생 회복할 수 없다. 만일 지금 청력을 회복시켜 준다면 당신은 그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귀를 고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뭐라고 할지. 단,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쓴 직후의 베토벤 말이다. 이미 예술을 위해서 봉사하기로 했고, 이 슬픈 운명과 죽음을 기꺼이 맞기로 결심한-그러나 죽음이 최대한 느리게 다가오기도 바란-베토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베토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청력상실로 인해 자신을 유일하게 지탱해 주는 예술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말이다.
베토벤은 일명 낭만적인 천재의 운명, 비극적이고 운명을 이겨내는 극복서사의 전형을 정립한 인물이다. 후대의 작곡가들은 그런 베토벤의 모습을 동경했고 때로는 그런 비극이 천재에겐 당연하다 했다. 하지만 베토벤 본인은 어떨까? 차라리 예술이 없고 귀가 먹지 않은 삶의 선택지가 있다면 그는 그것을 고르지 않았을까? 설령 그가 불후의 명작을 버리고 평탄하며 귀가 들리는 삶을 선택한다 해도 난 베토벤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베토벤이 후일 만들어진 천재의 전형에 얼마나 잘 들어맞든지, 그는 결국 인간이었고 또 인간이었을 뿐이니까.
내가 베토벤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천재기 때문이 아니다. 귀가 먹는다는 불행을 겪고 절망해서도 아니다. 그렇게 죽고 싶을 만한 상황에 몰려서도 살아가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것은 편하다, 베토벤이 말했듯이 죽음은 차라리 고통을 끝내는 것이니까. 그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기를 택하고 그 고통 속에서도 한 줄기의 빛이나마, 행복이나마 찾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인간이니까.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서 '루트비히'는 전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살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던 베토벤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들 베토벤이 운명과 투쟁한다 말하지만 운명이라는 게 무엇인지 어찌 알겠는가. 베토벤은 운명이 아닌, 삶과의 투쟁을 했다고 생각한다. 행복하기 위한 투쟁. 세상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투쟁.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산책하고, 사색하고, 자연을 찾고, 후원자들과의 관계도 나름 유지해보려 하고, 사랑도 찾아다니고... 그 모든 것은 삶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전시실에서 산책하는 베토벤의 영상을 보며, 전원교향곡의 각 악장을 묘사한 그림을 빼면서 전원교향곡을 감상하면 그 점이 역력하게 느껴진다. 베토벤이 유서에 썼던 것처럼 그는 나쁜 사람도, 무기력한 사람도 아니었다. 언제나 분노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렇게 부드럽고 상냥한 곡도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베토벤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나는 이 글을 참 좋아한다. 운명이라는 것이 진짜 존재하는지 아니면 그저 허상에 지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베토벤은 애초에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 예술이 그를 붙들어 놓았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나는 베토벤이 예술이 아니더라도 어떤 다른 동아줄을 찾았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지 않은 척을 할지라도 베토벤은 삶을 사랑했다. 한 명의 사람보다도 한 그루의 나무를 사랑할 수는 있었겠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삶을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장애를 극복했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말은 베토벤에게는 너무나 일차원적이다. '장애에 맞선 투쟁' 또한 너무나 일차원적이다. 나는 베토벤의 위대함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뻔한 소리로 돌아와 버렸지만, 원래 미워하기는 쉬워도 사랑하기는 어려운 법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베토벤이 좋다. 너무나 삶을 미워하기 좋은 환경에서도 삶을 꾸준히 사랑했다는 점이 정말 좋다. 베토벤은 영웅을 찾아보기도 했다. 운명에게 탓을 돌려 보기도 했다. 분노하기도 해 봤다. 그러나 결국에 그가 돌아온 곳은 자연을, 인류를, 세상을 향한 사랑이었다. 그는 갑주를 두르고 운명과 싸우는 황금빛 기사가 아닌, 온 마음을 다해 세상을 향한 키스를 보내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 표현 방식은 그리 다정하지만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이 내 설명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후원자들도 그렇고, 후대 사람들도 그렇고. 어떤 사람들은 베토벤은 세상을 싫어하는 은둔자고, 틈만 나면 싸우고 분노했고 화냈고 그런 곳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혁명, 변동, 폭력을 상징한다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베토벤의 관 열쇠를 들고 빈 중앙묘지로 가서 관을 열어 직접 물어본다면,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이 2차 세계대전 도중 승리를 상징하는 연합군의 'V' 사인과 연관된 것보다는 자신의 곡이 EU 국가로 채택되었다는 것에 훨씬 기뻐할 것임을 말이다.
베토벤의 관 열쇠다. 가지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강했는지... 베토벤이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의 행복을 빌어 줄 정도로 성자 같은 사람이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분명 베토벤은 인류 전체는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박물관에 온 사람들도 편안한 얼굴이기를, 뒷마당에서 커피를 마시는 어른들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웃고 있기를, 그리고 귀나팔 모양 조형물에 앉아 베토벤의 음악을 감상하는, 14시간의 비행과 10시간이 넘는 기차여행 끝에 빈에 도착한 내게도 행복을 빌어줬을 것이다. 귀나팔 안에 누워 약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맞으며 베토벤의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늦은 오전의 조금씩 소란스러워지려 하는 고요함이 좋았다. 베토벤이라면 분명 푸르른 하늘과 둘러싸인 담장 안쪽의 녹음, 그리고 조용한 전원의 분위기로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치유를 받고 갔기를, 자신이 전하려 했던 사랑을 느끼고 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 저 귀나팔 안에 방석이 있어서 음악을 들으며 앉아있을 수 있다. (출처: Wien museum) 하일리겐슈타트는 그런 곳이다. 베토벤의 죽음과 고통이 아닌, 삶과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이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정원에 한가로이 누워서 베토벤의 음악을 즐기다 보니 어느덧 열한 시 반이 훌쩍 넘어 있었다.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이 뒤로 박물관 네 개를 더 갈 수 있을지 걱정되는 시간이었다. 점점 시끌벅적해지는 베토벤 박물관을 뒤로하고, 굿즈샵에 들러 베토벤 곰돌이와 모차르트 곰돌이를 하나씩 산 뒤 몇 대 다니지도 않는 트램을 타고 나는 다음 박물관으로 향했다.
귀국하고 난 지금 알게 된 사실인데, 박물관에서 머지않은 곳에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자주 걷던 산책로가 있다고 한다. 나는 알지 못했고-머리로 베토벤 하일리겐슈타트 산책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진짜로 와보니 연결을 짓지 못했다-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무료입장의 날이라는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토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일리겐슈타트 산책로를 걸으며, 베토벤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같은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꼭 가져 보기를 바란다. 때로 그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통로는 그 사람의 집이 아닌 곳에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일리겐슈타트 산책로에 대한 감상을 들을 수 없어 아쉬우시다면, 추후 연재될 11편 베토벤 파스콸레티 기념관과 13편 본 베토벤 박물관 방문기를 기다리며 조금이나마 아쉬움을 달래주시기를.
최종평가
명칭: Beethoven Museum (베토벤 박물관)
운영시간: 금토일 10:00~17:00, 12:00~13:00은 휴식시간
입장료: 성인 8유로, 할인가 6유로
사이트 링크: WIEN MUSEUM - Beethoven Museum
1. 도시 접근성: ★★★★★
빈. 입 아프다.
2. 도시 내 접근성: ★☆
이거 힘들다. 내가 지내던 신시가지 구역에서 트램을 타고 50분이 걸렸다. 빈 완전 중심부에 묵어도 트램으로 30분일 테다. 트램을 타고 가도 거기서 또 한 10분을 더 걸어야 한다. 그래도 인간이 못 할 짓까지는 아니다. 1점을 줄까도 잠시 고려했지만 1점은 역시 다른 박물관들을 위해 아껴놓아야 할 것 같다. 정 힘들다면 아예 Getyourguide 등에서 단체투어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U4 지하철을 타고 하일리겐슈타트 역에서 내려 37A 버스를 타거나, 도심에서 37번 트램을 타고 가면 된다. 나는 환승이 싫어서 트램을 택했다.
3. 소장품: ★★
정말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하일리겐슈타트의 명성에 비해서는 많이 실망스럽다. 하일리겐슈타트, 솔직히 베토벤 아니었으면 살면서 이름 한 번 들어 볼 일 없는 동네인데 베토벤으로 이렇게 많이 팔리고 있으면 유서 원본 정도는 전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유서를 레플리카로 놓다니... 실망이었다. 그래도 베토벤의 머리카락, 베토벤 관 열쇠, 리스트가 소장하던 베토벤 데스마스크, 베토벤 집에서 뜯어온 문짝 (!!) 정도까지 최선을 다해서 전시하고 있는 것 같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이건 베토벤 관련 소장품은 빈이 아니라 본 박물관에서 더 많이 소장하고 있어 생기는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베토벤 집의... 문. 독한 사람들이다. 4. 언어 지원: ★★★
여기서 영어가 안 된다면 빈 박물관에 정식으로 항의를 넣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베토벤의 명성에 비해 언어 지원이 풍부하지는 않아 독일어와 영어뿐이고 앞서 봤던 하이든박물관, 슈트라우스 박물관과 비슷한 수준이다. 정 영어가 안 된다면 겟유어가이드나 다른 투어 대행사에서 한국어 가이드를 구해가는 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5. 가성비: ★★★
다른 빈 뮤지엄 산하 작곡가 박물관 입장료는 모두 5유로인데, 베토벤만 8유로였다. 고까웠지만 나는 무료로 입장하기도 했고, 다른 박물관들에 비해 전시도 깔끔하고 규모도 큰 편이기 때문에 8유로가 막 아깝지는 않다. 딱 적당한 가성비였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체험시설이나 헤드셋, 미디어 전시가 꽤 있어서 돈이 많이 들긴 할 것 같다.
6. 규모: ★★★★
베토벤의 명성을 생각하면 집 다섯 채쯤이 전부 박물관으로 쓰여야 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아쉽지는 않은 크기다. 한 전시실당 작은 방이 3개 정도라 생각하면 되니까 다 합치면 약 18개의 방이 있는 셈이다. ㅁ자형 건물 전체를 다 전시실로 활용하고 있어서 은근히 전시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안뜰을 오고 가는 재미도 있다.
7. 상호작용: ★★★★
4점 등장! 위에서 말했던 '베토벤 청력상실 체험 건반'이나, '화음을 누르면 음악을 들려드려요' 건반이나, 유리판을 슬라이딩해서 전원교향곡을 들어보세요 섹션이나, 베토벤을 주제로 한 영화를 틀어주는 곳이나, 베토벤의 귀 치료 요법 메커니즘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곳, 베토벤이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서 특수제작한 피아노 (깔때기처럼 소리를 확대해 주는 판이 달려 있다) 등등 다양한 체험과 다각도의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그때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체험을 안 하고 지나쳤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있는 건 죄다 체험하고 올 걸 하는 후회가 살짝 든다.
8. 굿즈: ★★★☆
막 예쁘게 뽑는 건 아니지만 여기 아니면 뭐 달리 살 데라도 있는가. 베토벤과 모차르트 곰돌이를 팔고 오르골도 판다. 다만 오르골은 나중에 나올 본 박물관에서 훨씬 예쁘고 다양한 오르골을 팔고 있으니 이곳의 양산형 오르골 구매는 지양해 주시기를 간청드린다. 나름 품목도 다양하고 샵도 큰 편이라서 4점을 줄까 했는데...
이곳에는 하일리겐슈타트 프리미엄이 엄청나게 붙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이곳에서 내가 구입한 베토벤과 모차르트 곰돌이는 각 15유로였다. 그리고 파스콸레티 하우스에서 새로 보게 된 베토벤 곰돌이는 10유로였다. 독자분들이여, 베토벤 박물관을 여기만 가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베토벤 박물관도 간다면 나처럼 호구짓을 하지는 말아라! 비싸게 산 것이 억울해서 0.5점을 추가로 깎았다.
아, 억울해.
9. 큐레이팅: ★★★★★
빈 시기에 집중하고 있기도 하고, 인생을 여섯 개의 테마로 나눈 것도 훌륭했으며, 바깥 공간도 단순히 정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시의 연장선상으로 만들어 주었다. 3관 Composing에서 보여주는 유서로 덮인 책상 레플리카, 그리고 그 위 놓여 있는 귀나팔은 전시의 하이라이트. 평범한 박물관처럼 서랍장과 액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자나 비어 있는 가운데 공간들에도 이런저런 시설물들을 설치함으로써 박물관의 격을 마치 미술관처럼 한 단계 끌어올렸다.
10. 총평: ★★★★
베토벤을 배우러 가는 곳이 아니라, 베토벤이 되어 베토벤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는 곳. 소장품 부족을 큐레이팅으로 잘 극복해 냈다.
최대 장점: 감동이 있는 큐레이팅, 체험 시설, 아쉽지 않은 규모와 풍성한 굿즈
최대 단점: 명성에 비해 부족한 소장품과 떨어지는 접근성
추천 여부: O
9화 예고: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1797년 태어나 1828년 죽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비록 그 인생은 31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으나 '가곡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들장미' '겨울나그네' '마왕' 등 최고의 가곡들을 쏟아냈다. 오스트리아의 소박한 서민 정서가 그대로 담겨 있는 작곡가의 소박한 집에서 소박한 박물관을 기대해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