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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굴꾼 Aug 13. 2024

04. 프라하 드보르작 박물관에 가다

사람 냄새 나는 작곡가와 사람이 따뜻한 박물관

일명 '음악의 불독' 안토닌 드보르작. (출처: 위키백과)

안토닌 드보르작. 또는 드보르자크. 가히 체코 대표 작곡가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은 유명 작곡가. 대표작으로는 교향곡 9번 (신세계 교향곡), 슬라브 무곡, 현을 위한 세레나데, 첼로 협주곡 B단조, 피아노 트리오 '둠키', 루살카 등이 있다. 특히 그의 실내악곡은 하나하나가 보석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는데, 내가 드보르작을 모든 작곡가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좋아하기 때문이다. 드보르작보다 좋아하는 작곡가는 아무리 잘 쳐줘도 두 명이 넘지 않는 것 같다. 드보르작은 낭만주의자들의 전쟁 시대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자수성가형 서사를 써내려간 작곡가다. 바그너를 좋아하면서도 브람스의 동료였던 그는 바그너와 브람스의 매력을 동시에 흡수했으면서도 특유의 민족적 감성까지 놓치지 않는다.


멘델스존을 제일 좋아하고, 브람스를 좋아하지만, 드보르작이 더 좋다, 라! 아, 참으로 가벼운 취향이다. 나는 으레 클래식에 심취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꼽는 말러나 바그너와는 상극이다. 반대로 드보르작의 깔끔하고 스트레이트한 선율, 따스하고 포근한 악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 전체에서 느껴지는 힘과 열정, 무엇보다도 드보르작 특유의 리듬감은 하나하나가 내 마음에 쏙 든다. 가끔 금관이 조금 시끄럽다는 생각은 하지만 언제나 거대한 대자연처럼 밀려오는 드보르작의 힘 있는 선율과 리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드보르작은 브람스보다 자유롭지만 바그너보다 조용하고 스메타나보다 글로벌하지만 리스트보다 민족적이며, 멘델스존보다 웅장하지만 베를리오즈보다 소박한, 일명 중용의 작곡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과유불급 취향인 내게 딱 들어맞는 셈이다.


*낭만주의자들의 전쟁 (The war of Romantics): 바그너와 브람스를 각 진영으로 둔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격돌을 일컫는다. 양측은 서로의 이상을 공격하고 때로는 인신공격까지 감행해 가며 자기 측의 이상을 설파하려 애썼다.


드보르작 박물관은 붉은색과 금색이 눈에 확 들어오는 2층짜리 작은 건물이었다. 푸르른 안뜰 안쪽으로 들어가 앞쪽이 입구인지 뒤쪽이 입구인지, 아니 문이 열려 있긴 한 건지, 국립박물관이라면서 이렇게 고요하고 조용한 곳이어도 괜찮은 건지를 고민하는 데 30분 가까이를 쓴 것 같다. 혹시나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싶으면 '절대 나 클래식 작곡가에게 관심있어서 유럽에 교환학생까지 온 사람 아녜요' 하는 척 안뜰 벤치에서 한가로이 책을 읽다가 또 그 사람이 지나치면 건물 외벽을 찬찬히 뜯어보고, 혹시 여기 주변에 드보르작 관련 팻말은 없나 생각하기를 거듭했다. 4월 초순은 아직 쌀쌀해서 나뭇가지들이 앙상했지만 5월이나 6월에 간다면 환상적인 정원일 것 같았다.

드보르작 박물관. (출처: 프라하 국립박물관)

드보르작 박물관은 이 시점까지 갔던 모든 박물관 중에서 가장 작은 곳이었다. 1층에 방이 두어 개 정도, 그리고 2층에 또 방이 두어 개 정도. 1층과 2층을 다 같이 붙여 놓아도 한 40평, 그러니까 경기도 외곽의 좀 넓은 집 크기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도 안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작은 박물관에 뭐라도 볼 게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국립박물관이라고 한 것 치고는, 한국 북촌에서 몇 번 다녀왔던 사립박물관들보다도 작아 보이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쩐지 직원 분과 잘 소통이 되지 않았다. 아, 제발 박물관 직원들은 어떻게 좀 외국어, 최소한 영어에 능통한 사람들을 뽑아 줄 수는 없으신 건가.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한 건 굿즈 상태였다. 스메타나 박물관에서 잠깐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스메타나 박물관과 드보르작 박물관은 같은 기관에서 운영하고 있다. 때문에 스메타나 박물관에서 오르골을 팔았으니까, 드보르작 박물관에서도 당연히 같은 오르골을 팔고 있겠지? 하고 갔는데 웬걸, 스메타나 오르골은커녕 드보르작 오르골도 없었다. 평범한 음표 자석이나 에코백, 엽서 몇 장 정도가 전부였다. 이곳도 굿즈샵은 1평도 안 되고 티켓카운터가 곧 굿즈샵이다. 역시 스메타나 박물관에서 오르골을 사고 왔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뼈저리게 밀려왔다. 그래도 드보르작 박물관의 입장료는 스메타나 박물관과 똑같이 무척 저렴했다. 설령 안에 영 볼거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돈이면 버리는 셈 치고 낼 만하다 생각하며 티켓을 샀다.


그러나, 문을 들어간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드보르작이 그 길고 긴 항해 끝에 미국에 도착한 순간에 받은 충격도 내가 드보르작 박물관을 관람하기 시작했을 때의 충격에는 미치지 못할 테다. 두 층은 각각 방이 두 개씩밖에 되지 않는 작은 건물이었지만 내부는 소장품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당시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내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드보르작 박물관에는 다음과 같은 소장품이 있었다.

지갑 2종류, 회중시계, 캠브릿지 학위수여식에서 입은 학사복, 접이식 톱해트, 피아노, 비올라, 벽걸이 십자가, 안경, 깃펜, 문진, 여권, 펜홀더, 비올라퀼트, 수통, 손수건, 재떨이, 방문카드, 책상

이때까지 나는 이렇게 화려한 소장품을 자랑하는 박물관을 본 적이 없었다. 작곡가가 원래 사용하던 물건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지금까지도 드보르작 박물관은 리스트 박물관과 바그너 박물관 정도를 제외하면 최고의 소장품을 자랑하는 박물관이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손이 덜덜 떨렸다. 한국어 설명에는 분명히 '드보르작의 안경'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지만 드보르작의 손때를 탄 물건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읽고도 믿기지 않아 한국어로 한 번, 영어로 한 번, 그리고 체코어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한 번, 거듭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번역 결과는 명확했다. 다 드보르작의 물건이 맞고,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던 것이다. 전시를 시작하는 큰 방에만 해도 여권과 책상이 있었다. 책상에는 '앉지 마세요' 였는지 '만지지 마세요'였는지 주의 문구가 붙어 있긴 했지만 접근을 막는 것은 하나도 없어서 원한다면 몰래 앉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물론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때의 나는 온 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과 환희에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커도 10평이 채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전시실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많은 소장품 사진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아래 사진은 드보르작의 잉크통과 펜.

드보르작 박물관은 대부분의 박물관과 비슷하게 작곡가의 인생을 따라가는 전시를 하고 있다. 같은 기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박물관임에도 불구하고 드보르작 박물관은 스메타나 박물관에 비해 무척 전시가 깔끔했다. 스메타나 박물관은 사진의 사진이나 악보의 사진, 편지의 사진을 붙여 놓아 놓고는 '스메타나의 무슨무슨 곡 악보.' 이렇게만 이야기해두고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아 애로사항이 많았다면 드보르작 박물관은 드보르작의 인생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도 한 번에 드보르작이라는 사람의 인생사를 따라가기 쉽게 구성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건 드보르작의 인생 자체가 마치 완벽한 해피엔딩 드라마처럼 일직선 구조로 정리하게 쉽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도 결국 어떤 결실도 보지 못하고 죽는 작곡가도 있고, 한때는 인기가 있었지만 인생 후반부에 가서는 이미 한물 간 뒷방 늙은이가 되는 작곡가도 있다. 작품성은 뛰어났음에도 이렇다 할 만한 자리를 꿰차지 못하고 한직을 전전하기만 한 작곡가도 있고, 젊은 시절 걸작을 내놓았지만 그 뒤로는 그 걸작을 뛰어넘는 작품을 쓰지 못해 단 한 곡으로 기억되는 작곡가도 있다. 어떤 작곡가의 인생은 속시원한 성공이 없어서 답답하고, 어떤 작곡가의 인생은 아무런 시련이 없어서 답답하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그렇지 않다. 정말 어떤 위인전의 도식에도 끼워맞출 수 있을 듯한 인생이다.


드보르작은 그리 부유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났고 그리 부유하지 않은 청년 시절을 보냈다. 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고 피아노 교습을 하며 근근이 입에 풀칠은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때로는 본인이 쓴 악보를 장작삼아 태워버려야 겨울의 추위를 그나마 버틸 수 있던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젊고, 재능 있고, 가난한' 작곡가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제출한 드보르작의 작품을 본 독일 음악의 거성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이 가난한 음악가를 지원해주기 시작한다. 곧 드보르작은 유명 출판사 짐로크와 연을 맺어 '슬라브 무곡'을 출판하고, 이 '슬라브 무곡'은 불티나게 팔려 드보르작을 일약 대스타로 만들어 준다. 수많은 걸작들을 쏟아내며 결국 체코인들의 존경과 함께 위인이 되어 세상을 떠난 드보르작의 인생은 정말이지 와, 위인전을 쓰려고 했을 때 이보다 공식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다. 인생 초반부에 찾아온 시련과 운명처럼 다가온 조력자, 꾸준한 노력과 기회를 놓치지 않는 대담함, 거기에 애국심까지. (다른 작곡가들과는 다르게 이렇다 할 지저분한 사생활이 없는 건 보너스다.) 드보르작의 인생에 대해 처음 찾아봤던 때 나도 그림처럼 그려낸 것 같은 서사에 분명 위인전 도식에 끼워맞추기 위해 그의 인생사를 누가 손질한 것이 분명하다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도 클리셰는 다 클리셰인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클리셰적인 이야기를 사랑한다. 나 또한 그렇다. 나 또한 선량한 사람이 갖가지 역경을 만나지만 결국에는 약간의 운과 피나는 노력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드보르작의 인생은 달콤한 뒷맛을 남기는 해피엔딩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드보르작의 음악 또한 뒷맛이 좋다. 모호함도 없고 우울함도 없다. 순수함과 건강함만이 있을 뿐이다. 황소처럼 우직한 끈기로 지면을 뚫고 나오는 그의 생명력과 힘은 무기력과 우울에 빠진 나를 종종 격려해주곤 했다.


드보르작은 천재형 작곡가는 아니다. 특히 드보르작의 수많은 오페라들 가운데 살아남았다 부를 수 있을 만한 건 루살카 하나뿐이다. 걸작과 평작의 비율로 따지자면 평작이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내게 용기를 준다. 결국 중요한 건 잘 하는 게 아니라 많이 하는 거다, 뭐든지 하면 된다, 그런 무식할 정도로 순수한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희망. 드보르작의 음악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 판도라가 마지막으로 상자를 닫은 순간에 유일하게 상자 안에 남아 결코 인간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 따뜻한 희망은 어찌 보면 가장 근본적이고 깊숙한 감정이라 그런지 종종 나를 감동시키고는 한다. 드보르작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사람냄새는 그 희망 덕분일지도 모른다.


드보르작 박물관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사람 냄새다. 세살짜리 막내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미국으로 가야 할지 말지를 안건으로 부쳐 가족투표를 했다는 이야기라든가, 딸들 지참금 벌겠다고 열심히 미국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라든가, 케임브릿지 대학교 학위수여식에 가서 라틴어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사람 냄새 말이다. 드보르작의 매력은 그가 위인이라서 느껴지는 존경심이 아닌, 사람이라서 느껴지는 정감에 있다. 그 일화들을 담고 숨쉬는 드보르작의 비올라케이스와 케임브릿지 학사복, 잉크통 등의 소장품이 진열된 좁은 회랑을 지나면 드보르작의 생활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1층의 작은 방이 나온다. 방 안에는 그의 뵈젠도르퍼 피아노와 벽걸이 십자가가 있다. 그 십자가마저도 종교적 상징보다는 체코의 평범한 가정집이라면 있어야 할 것 같은 물건으로 느껴진다.

드보르작의 피아노와 드보르작의 벽걸이 십자가.

1층에서 드보르작의 인생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소장품들을 구경했다면 2층으로 올라갈 시간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작은 연주회장이 펼쳐진다. 천장과 벽은 바로크풍 회화를 그려 놓아 유럽 궁전에 들어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프레스코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나도 '와, 여기 2층은 궁전만큼이나 화려하네!' 라고 생각했고 나중에서야 그 기둥 장식들이 부조가 아닌 그림이라는 걸 알았다.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된 방 안에는 의자 20개 정도가 세 줄로 나열되어 있고 그 앞에는 아름다운 하얀색 피아노가 놓여 있다. 이 피아노를 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피아노 옆에 있는 TV에서는 드보르작의 인생사를 설명해주는 30분 정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틀어 주고 있었다. 작곡가 박물관 기행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스메타나 박물관보다는 프라하의 무하 박물관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예술가의 인생과 예술에 대한 설명을 해 준 뒤, 그 설명을 종합하는 30분짜리 다큐를 틀어준다는 점이 꽤 비슷하다. 30분짜리 다큐라니,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직접 앉아서 보니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짐로크사와의 관계라든가, 미국 생활 내용 등 소소하지만 나는 잘 몰랐던 드보르작의 이야기들을 알려주는 다큐였다. 무엇보다도 다큐멘터리에서 적절한 순간에 드보르작의 곡을 삽입해 준다. 중간에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을 포핸즈로 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피아노를 치는 손 두 쌍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손 두 쌍의 모습을 넋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첼로 협주곡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아아, 신세계 교향곡이 나올 때 벅차오르는 가슴이란! 드보르작의 가장 유명한 곡이자, '9'의 계보를 잇는 교향곡! 드보르작 하면 떠오르는 모든 것과 그 이상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30분 동안 앉아서 볼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물론, 그 30분동안 주변의 진열장을 둘러본다는 선택지도 있다. 단점이라면 다큐멘터리 상영 공간이 전시장이라서 남들은 불이 꺼진 상영실에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동안 남들의 시야를 방해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조심 움직여야 한다는 것. 드보르작의 사진과, 드보르작의 톱해트, 신발, 악보, 지갑, 회중시계는 여기 있다. 참고로 24년 9월 30일까지는 "드보르작: 나의 삶과 음악" 이라는 1인칭 제목을 단 특별전시가 진행중이다. 드보르작의 다양한 자필보를 로테이션으로 전시하는데 내가 갔을 때는 드보르작의 피아노 삼중주 '둠키' 악보가 전시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었기에 더욱 각별했다.


2층 메인 전시실 뒤쪽으로 들어가면 드보르작의 곡을 들어볼 수 있는 작은 섹션이 마련되어 있다. 드보르작의 인생이 한번에 연도와 도표로 정리되어 있고, 이유는 모르겠는데 드보르작의 실루엣이 그의 178cm 키를 반영해 벽에 붙어 있다. 혹시 남자라면 내가 드보르작보다 큰가 작은가를 한 번 벽에 서서 비교해 봐도 좋을 것 같다. 그 앞에 있는 헤드셋은 키패드에 번호를 입력하면 원하는 드보르작의 곡을 재생해 준다. 꽤 많은 곡들을 재생할 수 있으니, 드보르작 팬이라면 이 공간에서만도 몇 시간은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미 드보르작 박물관에 오기 전 드보르작의 교향곡 9곡과 피아노 삼중주들, 현악사중주들을 통째로 다 듣고 온 길이라서 이곳에서는 음악을 오래 듣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대신 다른 데에 시간을 많이 썼다.


그럼 대체 어디에 썼냐. 스크린 아래에는 손잡이가 달린 서랍이 하나 있다. "안토닌 드보르작의 초상화를 완성해 봐요" 라 적힌 서랍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체험이라면 껌벅 죽는 어린아이였던 내게 이런 체험형 컨텐츠는 참을 수 없이 매혹적인 선택지였다. 등 뒤를 보자 나보다 이전에 왔던 사람들이 완성해놓고 간 드보르작 초상화들이 앨범에 끼워져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드보르작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드보르작, 요정 날개를 단 드보르작, 몸이 첼로인 드보르작 (...) 까지. 안타깝게도 서랍 속에는 색연필만 있고 드보르작의 몸을 그려 줄 수 있는 종이가 없었다. 체념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경비원 분께서 나타나시더니 친절하게 웃으시며 내게 드보르작 초상화 그리기 체험 종이를 주셨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하고 드보르작 초상화를 진심전력을 다해 꾸몄다. 1830년대에서 40년대 남자 옷을 가장 자주 그리다 보니 드보르작의 옷도 미묘하게 허리선이 올라간 채로 그려지긴 했지만, 아마 그 앨범에 들어 있는 드보르작 초상화 중에서는 가장 멀쩡한 축에 속하는 드보르작을 완성했다. 나는 이 컨텐츠를 일명 '드보르작 꾸미기' 줄여서 '드.꾸' 라고 부르는데, 지금까지도 이 '드.꾸' 를 능가하는 체험형 컨텐츠는 없었다. 어린아이들이나 할 것 같은 체험형 컨텐츠를 즐겼다는 짜릿함을 느끼며 다시 한 번 1층으로 내려가는 층계참에 서자 방명록이 눈에 들어왔다. 방명록! 앞선 박물관들에서는 방명록을 적었는지 적지 못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드보르작 박물관 방명록은 눈에 들어온 이상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펜이 없어 곤란해하고 있자 또 아까의 그 경비원 분께서 내게 펜을 빌려주셨다. 정말 친절한 직원분이셨다. 그 분께 감사하다는 말을 방명록에 적었는지 적지 못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체코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해 주신 분이셨다.

나의 드.꾸 (드보르작 꾸미기.)

이렇게 작은 박물관에서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비록 부족하고 미흡한 점도 많았지만 좋아하는 작곡가의 흔적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시간이어서였을까, 드보르작 박물관을 떠나는 발걸음은 예상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지체된 일정에도 불구하고 깃털처럼 가벼웠다.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이렇게 즐거웠으니, 이제 프라하를 잘 떠날 일만 남았다!' 라는 생각을 하며 구름 반 햇살 반의 거리로 나설 때는 거의 콧노래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됐었다.


프라하에서 만하임으로 돌아가는-아니 정확하게는 그 중간 지점인 뮌헨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탈 때는, 뮌헨에서 프라하로 갈 때와는 달리 한가했다. 눈을 감고 드보르작의 음악으로 빠져들면 그 어떤 안내방송도 들리지 않았다. 애초 영어로는 안내방송을 해 주지 않고 체코어와 독일어로만 안내방송을 해 줘서 귀를 귀울여 봐야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이제 저녁쯤 만하임에 도착하겠군, 하며 눈을 감으려 하는데 갑자기 차가 멈춰섰다. 뭔가 좀 오래 멈춰섰다.


프라하와 뮌헨을 왕복하는 기차는 두 종류의 기차가 연결되어 있는 형태다. 차 한 대는 중간에 연결을 끊고 프라하로 돌아가고, 다른 차 한 대는 뮌헨으로 향한다. 이미 뮌헨에서 프라하로 올 때 경험해 본 적이 있었지만, '프라하에서 뮌헨으로 가는 기차' 좌석을 자동으로 배정해 줬으니 티켓에서 지정해 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설마 무슨 문제가 생기겠나 싶었다. 상식적으로 프라하에서 뮌헨으로 가는 기차 표를 샀는데 중간에 프라하로 돌아가는 기차 칸에 좌석을 배정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차가 다시 출발하더니, 역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했다. 이러다가 다시 앞으로 갈까 하는 희망을 품어 봤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외국인들이 자기들끼리 대화를 시작했다. 이 기차 뮌헨으로 가야 하는 거 아냐? 왜 역방향으로 가지? 혹시 아까 분리된 기차로 넘어갔어야 했던 거 아냐? 한적한 기차에서 패닉에 빠진 외국인은 총 네 명. 아시아계 캐나다인 한 명, 대만 사람 한 명, 폴란드인 한 명과 나. 독일어와 체코어 그 어느 것도 모국어로 구사하지 않는 네 사람이었다. 아까 차가 오래 멈춰섰을 때 다른 사람들은 안내방송을 듣고 전부 차를 옮겼던 것이다. 낙오자 네 명은 가장 가까운 역에서 내렸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변변한 역사조차 없고 가장 가까운 가게까지 걸어서 20분이 걸리는 곳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고 역사에는 역장 한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하필 그날 치마를 입고 있어서 이가 절로 딱딱 부딪혔다.


다음 기차가 오기까지는 적어도 한 시간이 걸렸다. 낙오자들은 묘한 연대의식을 형성했고 그 자리에서 한 시간이 넘게 수다를 떤 뒤 기차에 올라탔다. 그 기차가 중간에 끊기자 다시 다음 기차로 갈아타고, 그 기차가 또 선로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버스로 갈아탄 뒤, 뮌헨으로 가는 기차에 마침내 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허허벌판에 덜컥 낙오되는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네 명이 함께 있었기에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함께여서 즐거웠던 기억만이 난다. 뮌헨역에서 각자의 목적지로 헤어지고 나서는 좀 쓸쓸했지만, 여전히 그 기억은 교환학생을 하면서 남은 가장 귀중한 추억 중 하나였다. 뮌헨역에서 벌벌 떨며 노숙자들과 세 시간을 합숙했지만 무릇 교환학생이라면 그런 드라마틱한 사건 하나 정도는 겪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새벽 여섯 시, 낙오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늦은 시간에 기숙사에 도착하고 잘 들어갔다는 문자를 보낸 뒤 침대에 쓰러질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기억을 만들어 주는 건 언제나 사람이다. 드보르작 박물관의 친절한 직원 분처럼, 프라하에서 함께 낙오된 소중한 세 명의 친구처럼, 그리고 드보르작처럼.


최종평가

명칭: muzeum antonína dvořáka (안토닌 드보르작 박물관)
운영시간: 수-월 10시부터 오후 5시
입장료: 70코루나, 학생 50코루나 (한화로 각 4천원, 3천원 상당이다.)
사이트 링크: Antonín Dvořák Museum - National museum (nm.cz)

1. 도시 접근성: ★★

역시나 프라하다. 스메타나 박물관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반복하지 않겠다.


2. 도시 내 접근성: ★★★

프라하 신시가지에 있으나, 트램을 타지 않으면 중심 관광지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래도 와야지 마음먹으면 못 올 곳은 절대 아니다.


3. 소장품: ★★★

드보르작의 서랍을 통째로 뜯어온 것만 같은 박물관이다! 위에 열거한 소장품 하나하나에서 드보르작의 손때가 느껴진다. 게다가 악보나 편지도 소장하고 있다. 드보르작이라는 사람이 제대로 느껴져서 너무나 사랑스러운 곳이다.


4. 언어 지원: ★★★

한국어가 지원된다! 프라하에 그렇게 한국인들이 많았던 걸까? 중간중간 약간의 오타가 있긴 했지만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안내문은 코팅한 종이인데, 관람을 끝내고 나면 돌려줘야 한다. 생각보다 설명이 굉장히 깔끔하고 자세하게 적혀 있기 때문에 관람하기 편했다.

드보르작 박물관의 한국어 안내문.

5. 가성비: ★★★★★

이런 소장품을 가지고 있는데 스메타나 박물관과 같은 가격이라니. 너무 좋아서 울 수도 있을 것 같다.


6. 규모: ★★

스메타나 박물관과 비슷하다. 사람이 많다면 정말 만원버스보다 꽉 끼는 기분이었겠지만 다행히도 이곳 역시 제법 한가한 편이라서 작은 규모에도 불구 답답하지는 않다.


7. 상호작용: ★★★

드보르작 꾸미기가 재미있어서 5점을 주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객관적으로는 상호작용이 많지는 않다. 그래도 다큐멘터리, 헤드셋으로 음악 듣기, 드보르작 꾸미기 등 다양한 미디어를 최선을 다해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8. 굿즈: ★

드보르작 관련 서적이나 CD를 팔고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굿즈는 아니었다. 굿즈샵의 크기도 너무 작았다.


9. 큐레이팅: ★★★

드보르작이라는 사람을 잘 느낄 수 있는 큐레이팅이었다. 인생사를 따라가고 있어서 깔끔하지만, 작곡가에 관한 소소한 일화가 적혀 있는 점이 크게 플러스이며 각각의 전시물들을 테마에 맞게 진열하고 설명해 주기 때문에 스메타나 박물관보다 1점을 더 줬다.


10. 총평:

작곡가의 숨결이 느끼고 싶다면 최고의 박물관. 저렴하고, 재미있고, 따뜻한 직원 분들이 맞아주신다. 프라하의 숨겨진 명소라고 감히 추천해 본다.

최대 장점: 저렴한 입장료, 화려한 소장품, 한국어 지원

최대 단점: 빈약한 굿즈샵, 작은 규모

추천 여부: O


프라하에서 극적으로 귀환했지만 쉴 수 없었다. 레지던스 퍼밋을 받자마자 음악의 수도, 빈으로 향해야 했으니까! 앞으로 무려 8편동안 시리즈 속의 미니시리즈, '빈의 작곡가 박물관' 이 연재된다.


5화 예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1732년 태어나 1809년 사망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대표작은 '놀람교향곡'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 등이 있다. 2024년 4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유럽 도시 빈에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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