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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Jun 30. 2020

좋은 메타포란 무엇일까?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고

"가장 좋았던 문장이 무엇이었나요?"


독서모임 전날 확인한 발제문의 상단, 제법 자주 보이는 질문에 눈길이 간다. 가장 좋았던 문장이라... 분명 책을 덮은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건만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번뜩이는 아포리즘이었나. 산뜻한 감정 묘사였나. 기억을 쥐어짜 보려니 몇 천 개쯤 되는 온점들이 눈앞에 어지러히 흩날린다. 한 페이지에 스무 개쯤, 300페이지 한 권이면 오륙천 개쯤 될 문장들이 뒤죽박죽 거리려던 찰나. 아니야. 이건 아니야. 세 페이지 짜리 메뉴판에서 메뉴 고르는 것도 쉽게 못하는데, 이게 가당키나 하겠어? 자조 섞인 혼잣말을 내뱉으며 책을 다시 꺼내본다. 누덕누덕 난잡하게 그어진 밑줄들. 그중 한 문장을 붙잡고 다시 읽어보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다. 처음 읽으며 뱉어냈던 감탄사는 휘발된 지 오래고 경탄은 그때와 같지 않다. 전날 남겨두었던 야식을 다음날 아침 뒤적거리듯 불쾌하게 식은 죄책감이 감돈다. 그래도 별 수 있나. 혹시 그때 느꼈던 감탄의 비말이라도 남아있을까 싶어 책장을 마저 들춰본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어떤 꾸준함. 내가 밑줄을 그어둔 문장에는 유독 메타포가 많았다. 혹시나 싶어 다른 책들을 꺼내보았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 진득하게 고민해본 적 없어 몰랐지만, 아마 메타포를 꾸준히 좋아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는 줄도 몰랐는데 매번 좋았다면 그야말로 찐사랑이 아닌가.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에서 단기 기억상실에 걸린 루시(드류 베리모어)가 어제 사랑했던 그 남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헨리(아담 샌들러)에게 매일 새롭게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그래서 메타포에 대해서 쓰기로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일관된 선호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며, 내가 아는 가장 좋은 고민의 방법은 쓰는 것이므로. 더욱이 사람이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위라면, 지금 메타포에 대해서는 써야만 하는 셈이다.


메타포. 우리말로 은유. 개체 간의 유사성을 포착해서 한 개체를 다른 개체로 치환하는 수사법으로 그리스어 meta-(~사이에, 넘어서)와 -phor(옮기다)가 합쳐진 단어. 메타포를 이야기하려면 시를 빼놓을 수 없다. 메타포는 시의 수사법이다. 산문에서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시의 수사법이라고 하는 이유는 시에서 그 맛이 더 살기 때문이다. 시가 말하는 방식과 메타포가 전달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덜 말하고 더 생각하게 한다. 사람 사이의 대화처럼 문학도 쓰는 이와 읽는 이 사이의 중간지대가 필요한데, 작가가 더 말하면 독자는 더 들어줘야 하고, 작가가 덜 말하면 독자는 더 참여해야 한다. 설득을 위한 글이 빼곡한 논리로 말하고, 소설이 부단히 서사를 메워나갈 때, 시는 한 발짝 물러난다. 서로 교습법이 다른 세 선생님 같은 것이다. 시는 학생들이 상상하고 참여하게 하는 선생님이고, 그런 수업에 적합한 수사법이 메타포이다.


메타포와 시의 관계를 잘 가르쳐주는 스승이 있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그려지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그렇다. 그의 실화이자,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영화화한 <일 포스티노>에서 네루다는 시를 배우고 싶어 하는 청년 마리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는 설명하면 진부해지고 말아.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정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뿐야" 이 영화의 모든 순간에 시는 메타포와 동치 되므로, 이 대사를 이렇게 다시 써도 무방하다. "메타포는 설명하면 진부해지고 말아. 메타포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경험해 보는 것뿐야"


마리오가 처음 시를 배우고 싶었던 이유는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 여자들이 파블로 네루다에게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시를 배우면 그처럼 인기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에게는 다소 불손하지만 어쨌거나 가식 없는 이유에서 시를 배우기 시작한 섬 청년 마리오의 삶은 메타포를 깨닫는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진다. 아름다운 베아트리체를 보고 사랑에 빠져서 "사랑에서 치료되고 싶지 않고, 계속 아프고 싶다"라고 말하던 그는, 어부인 늙은 아버지가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고 "그물은 서글프다"라고 울상을 짓다가, 문득 네루다에게 되묻는다. "선생님은 온 세상이 모두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 세상은 모두 무언가의 메타포다. 사랑에 막 빠진 이의 눈에는 세상에 태동하는 모든 것이 사랑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며,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는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이 사랑의 상실처럼 보인다. 실상 자연의 모든 것은 그와 상관없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임에도 자신을 사로잡은 감정으로 세계를 재해석한다. 메타포는 일상을 뒤덮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과 깊은 감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메타포가 가장 빈번하게 태어나는 순간은 사랑과 그 상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메타포는 가르칠 수 없다고 한 이유도 여기서 이해될 수 있다. 메타포는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겪어내는 것이다. 그런 감정을 겪는 이에게 혹은 그런 감성을 지닌 이에게 세상은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렇게 메타포는 태어난다. 태생이 이렇기 때문에 좋은 메타포의 반대말은 나쁜 메타포가 아니라, 죽은 메타포가 되고 만다. 죽은 메타포란 이미 널리 사용되어 관용구가 되어버린 것들을 의미한다. 사랑이 심장이라거나, 백마 탄 왕자님이라거나, 쓰는 사람도 노력하지 않았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인식의 확장도 주지 못하는 그저 읽히고 지나가는 구절들. 그것은 이미 죽어 메타포가 아니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따질 게재가 되지 못한다.


좋은 메타포는 새로운 동시에 널리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우면서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니 무슨 무책임한 광고주 같은 소린가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좋은 메타포는 이 모순적인 조건을 충족한다. 새롭기만 하고 사람들이 공감할 만큼 유사성이 없다면 단순히 혼자만의 글짓기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내가 "책은 겨울이다. 페이지마다 내린 글자는 마음에 와 닿기 전에 녹아내리고 만다."라고 멋대로 결부시킨다면, 쓰는 사람의 고유의 인식도 읽는 사람의 참여나 공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그냥 73바이트의 데이터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널리 공감할 수 있지만 새롭지 않은 예시는 앞에서 설명했던 '죽은 메타포'이다.


이쯤 되면 좋은 메타포를 쓰기가 뭐 이리 어렵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지금 '죽은 메타포'라는 것들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것들이 대중적으로 소모되기 전, 매우 새롭지만 널리 공감되었던 그 시절. 처음 사랑을 심장으로 그린 이를 상상해보자. 그 사람은 사랑을 앓다가 욱신거리던 가슴께를 부여잡고 여기가 아프다고 여기 마음이 있다고 호소했을 것이다. 통증은 그곳에 그것이 존재한다는 실존의 가장 확실한 증명이었을 테니 말이다. 같은 아픔을 겪었던 이들은 그의 말에 깊이 공감했고, 공감들이 모이며 사회적으로 약속한 적도 없는데 이제 사랑=심장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아무런 반박도 새로움도 없다. 그러므로 좋은 메타포는 떠올리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세상에 없는 것을 고안하고 발명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흩뿌려진 유사함을 찾아내는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비유에 대해 적었던 문장에 대해서 반박하는 것으로 메타포에 대한 에세이를 마치고자 한다.


"비유란 이런 것이다.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사실'을 영원한 '진실'로 못질해버리는 것이다.(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의 대부분의 문장에 동의하고 탄복해왔지만, 이 문장만큼은 동의하기 어렵다. 우선 비유는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일 수 있다. 예술의 태생적 본위는 아름다움이며, 그러한 예술의 오래된 재료가 상징과 비유이다.(상징도 비유이다)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은 비유의 본래적인 기능 중 하나다. 또한, 비유는 흘러가는 '사실'을 영원한 '진실'로 못질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사실'을 이어 이것이 혹시 '진실'의 한 면이 아닐까 하며 제시하는 것이다. 그게 진실인지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며, 그 판단의 과정이 비유를 소비하는 즐거움이다. 세상에 각기 존재하는 두어 가지 사실에서 공통점을 찾아 그것이 이면의 진실이라며 못 박는 것은 편집증적인 강박에 지나지 않는다. 비유란 아름다울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진실을 잠깐 쥐어 다른 이에게 보여줄 수도 있고, 한 때 진실이었던 그것이 다시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우연히 움켜쥐었던 진실이 빛을 내며 여러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더라도 이내 빛을 잃고 마는 까닭에 비유는 그 자체로 삶의 비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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