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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Jun 30. 2020

비 오는 날의 산책

일요일 늦은 오후 낮잠에서 깨었을 때, 바깥을 보지 않아도 아는 날씨가 있다.


살짝 열린 창으로 드는 공기가 눅눅하고, 그 무게에 눌린 것처럼 자동차 소리는 낮은 곳에서 웅성거린다. 옅은 채도의 빛이 블라인드를 지나 눈꺼풀에 닿으면 눈만 껌뻑이며 시간을 가늠해본다. 암막으로 가려두어도 맑은 날의 밤과 비 오는 오후의 어두움은 미세하게 결이 다르므로 아직 주말이 제법 남았음을 안다. 월요일로부터 반 걸음 물러서니 지금 이 순간의 느낌에 더 충실할 여유가 생긴다. 코와 입을 동시에 열고 크게 숨을 들이켠다. 물 냄새가 물씬하다. 속으로 찬 공기가 돌며 창 밖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차근차근 감각을 깨워주는 비 내리는 주말 오후, 내가 오감으로 사랑하는 순간. 나는 사랑하는 이의 발소리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가 오고 있음을 안다.



언제부터 그리 좋았는지는 떠올릴 방법이 없다. 사람마다 생애 최초의 기억이 다른데, 나는 좀 늦은 편이어서 6살 선교원을 다니던 시절이다. 그때도 이미 비 오는 날을 좋아했으니, 이 특별한 선호의 기원은 선사시대로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신뢰할 만한 제보자인 조여사에 따르면, 선수학습할 게 따로 있지 남들은 여섯 살에 한다는 미운 짓을 일찌감치 시작해 그녀가 학을 떼게 했던 미운 다섯 살, 그 나이에도 비 오는 날이면 그렇게 우산도 없이 뛰어다녔다고 한다. 나로서는 기억이 없으니 항변할 도리가 없으므로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어머니 닮아서 그랬나 봐요"하고 말 따름. 마냥 근거 없는 소린 아닌 것이 기억 속의 그녀는 비 오는 날이면 오디오를 틀어놓고 추억에 발목을 담그곤 했었다. 아직 어머니는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지 그녀도 사람이란 걸 모르던 시절이라 그 눈빛이 어찌나 생소하던지.



비 오는 날에는 산책을 하는 것이 좋다. 빗길을 산책하는 건 비와 우산만 있다면 누구나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특별한 장비나 숙련된 기술이 필요치 않다. 조금 욕심을 부린다면 품이 넓고 대가 튼튼한 우산과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여유면 충분하다. 다만, 비는 원하는 때에 오지 않으므로 비가 온다면 따져 물을 겨를 없이 우산을 챙겨 길을 나서야 한다. 비가 갠 뒤도 나름의 정취가 있으므로 비가 얼마나 올 것인지는 중요치 않으며, 어차피 떠난 곳으로 돌아와야 하므로 어디로 향할 지도 중요치 않다. 빗길을 걸어본다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양말이 그렇게 젖은 채로 어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나는 뽀송한 양말이 있는 집으로 어차피 돌아와야 할 운명이다.


빗길을 걸으면 오감은 더욱 예민해진다. 역시 피부엔 수분이 중요한지 촉촉한 땅은 여느 때보다 생기를 내뿜는데, 흙내음에서는 얼핏 풀내음도 섞여서 이른 봄의 쑥국 같은 향이 난다. 향수로 말하자면 탑노트는 흙냄새, 베이스 노트는 풀냄새가 나는 듯한 자연의 향기. 향수를 처음 사러 갔을 때처럼 걷는 사람이 없는 길을 골라 몰래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켜면 빗방울이 풀잎을 지나 땅으로 스며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살짝 젖은 바닥에 운동화가 닿으면 타박타박 소리가 난다. 마른 바닥에서보다 더욱 입체적으로 나는 그 소리는 듣다 보면 드럼의 스네어 소리 같다. 그리 들리기 시작하면 세 번째에 강세를 둔 고고 리듬처럼 걸음도 따라 '둥. 둥. 탁! 둥' 하게 되고,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를 셰이커 소리 삼아 연주는 풍성해진다. 같은 박자를 반복하면 리듬은 점점 고조되고, 나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마음이 울렁거린다. 어째서 밴드에서 중요한 게 기타와 보컬이 아니라 드럼과 베이스인지, 전쟁터에서 북을 그렇게 울려대는지 알 것도 같다. 홀린 사람처럼 빗길에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며 내달리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머쓱한 경험이 있었던 건 모두 리듬의 탓이다.



그러므로 비가 내린다는 말보다는 비가 온다는 말이 좋다. 같은 장면을 그리는 말이라도 곱씹다 보면 말맛이 미세하게 다른데, 비가 온다는 쪽이 더 달고 씁쓰레하기 때문이다. 비가 내린다는 말은 멀찍이 팔짱을 끼고 서서 일기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비가 내리니, 빨래를 걷어야 한다거나, 우산을 챙겨야 한다는 논리적인 말들이 뒤에 이어져야 할 것만 같은 기분. 좌뇌에서부터 시작된 전기신호가 오른손을 타고 빨래도 걷고 우산도 챙겨 들고 할 그런 기분. 그러다가도 비가 온다. 비가 온다. 반복해서 읽어보면 어딘가에 움츠리던 비가 그제야 내게로 오는 것 같다. 뒤 이을 말은 우뇌에서부터 올 일이다. 당신의 생각이 난다거나. 걷고 싶다거나 하는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감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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