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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Jun 30. 2020

소개팅으로부터의 사색

소개팅을 빙자한 성장담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써놓고 보니 선자리에나 어울릴 것 같은 질문 같지만, 소개팅에서도 몇 번쯤 주고받았던 질문. 선이었다면 각을 잡고 진지하게 답변해야 할 중요한 계약 요건이겠지만, 소개팅이기 때문에 가볍게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친다.


"어떨 것 같은데요?"



이어지는 상대방의 답변에 따라 상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누나나 여동생은 긍정적, 남자 형제가 있을 것 같다면 쏘쏘, 외동이라면 최악. 그리고 나는 남동생이 있을 것 같다는 답변을 주로 듣는 편이었다. 직업 때문인지 말투 때문인지 다들 남동생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도 2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는터라 꼭 패를 까발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티 내는 건 촌스러우니 너스레를 떤다.


"창희 씨는 남동생이 있을 것 같아요"


"저보다 더 경찰 같으신데요"


사실 남동생이 있을 것 같다고 추측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나는 어려서부터 누가 보아도 그냥 '2남 중 장남'이었다. '2남 중 장남' 안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는데, '2남'에 집중해서 보자면 '부잡스럽다', '장남'에 집중해서 보자면 '의젓하다'로 축약될 수 있다. 의젓하면서 동시에 부잡스러웠다고 하니 얼핏 어려서부터 꽤나 양가적인 인간이었구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는 '2남'쪽에 더 방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부잡스러운 놈들 가운데 그나마 의젓한 놈이었다는 뜻이다.


"차분하신 것 같아요"


"저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고, 친해지면 텐션도 장난 아니에요"


"그럼 지금 어색해서 이러시는 거예요?"


철이 좀 든 걸까 안경 덕분일까 차분해 보인단 소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서부터 우리 형제는 악명 높았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집구석의 미다스. 아니, 황금은 가게에 보탬이라도 되지 그저 파괴만 해버리는 통에 지나간 자리마다 황폐해지는 게 메뚜기떼 쪽에 더 가까웠다. 손주사랑은 본능인 줄 알았던 외할머니는 우릴 만난 이후로 내리사랑에도 마음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방 문 손잡이에 매달려 딸랑거리다가 문을 결국 주저앉히거나, 유리로 된 모든 것을 부숴버리는 이 어린 악마들을 앉혀놓고 외할머니는 자주 기도했다. 이 어린양들을 구원해달라고.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불온했던 우리는 외할머니의 기도가 본심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래 기도할 때 하는 내뱉는 말은 저 위에 계신 분이 아닌 같이 기도하는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거였으니까 우리는 그저 남들이 '주여' 하면 '주여' 하고, '아멘'할 때 '아멘'하면 그만이었다.


"제가 모태신앙이었는데, 지금은 교회를 안 다녀요"


"왜요?"


"선생님, 목사님 자식들이 엄청 잘 되거나 정말 삐뚤어진다고들 하잖아요. 그런 거예요"


"그런 거구나"


우리 집은 두 가지의 거대담론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 소속 국가는 '대한민국', 종교는 '기독교'. 여기까지 읽고 떠오르는 집안 분위기가 있다면 그게 대충 우리 집 맞을 것이다. 그만큼 전형적이다 우리 집이. 그런 우리 집에서도 가장 한국적이었던 순간은 우리를 혼낼 때였다. 집안 어른들은 칭찬에는 인색했지만 혼내는 일에는 아끼는 법이 없었다. 가르침은 온통 혼나는 일이었던 덕분에 대학에 입학하고서야 '훈육'이 혼내는 게 아니라 가르친다는 뜻이라는 걸 알았다는 건 웃지 못할 해프닝. 그런 와중에 사고는 같이 쳤어도 책임은 형이 더 많이 져야 한다는 가정 내 규율에 따라 언제나 나는 주범이기까지 했다. 형제가 나란히 석고대죄를 하고 처분을 기다리는 순간에도 나는 한 발짝 앞에 앉아 있었다. 어린 마음에는 그 한 발짝의 간격이 어찌나 아찔하던지, 어떨 땐 혼자 혼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집에는 자주 내려가세요?"


"아뇨. 일 년에 두세 번?"


"부모님이 서운해하시겠어요. 장남인데"


주입식 교육은 꽤 효과적이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당연히 형이 더 많이 혼나는 거고, 그걸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게 멋진 형이라고 생각했다. 가부장제가 품어온 남성호르몬 혈청을 주기적으로 투여받아 잔뜩 물들어버린 탓에 장남의 존재론적 고뇌와 태생적 의무감을 의연하게 버티는 게 '멋'이라고 믿었다. 김 씨 집안 장남은 집안 어르신들 말마따나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배우던 놈이었는지 멋과 함께 보상심리도 배웠다. 지가 멋있고 싶어서 참아놓고 또 형이니까 의무만큼 권리도 있어야 한다며 "좋은 건 나 먼저, 안 좋은 건 네가 다"를 주창했다. 당연히 반항하는 동생을 제압하는 것도 집안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4.3kg으로 태어나 평생을 작아본 적이 없었던 형을 둔 동생은 좀처럼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혈육관계에서도 한 번쯤은 '왕자의 난'이 일어나야 불합리한 관계도 재정립되곤 할 텐데, 동생에겐 요원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우악스러워질수록 동생은 곰살맞아졌다. 어른들은 그런 동생에게 "둘째가 딸 노릇 한다"고들 했다.


"동생이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요"


"동생이랑은 친하세요?"


"어렸을 때보다는요. 어렸을 때는 맨날 동생한테 라면 끓이라고 시켰거든요. 나는 한 번도 안 끓여봐서 물도 맞출 줄 모르니까 잘 끓이는 네가 끓여주라고"


"헐, 못된 형이셨네요"


한 차례 의례적인 웃음이 일었다가 금세 가라앉는다. 소강상태가 몇 초간 이어지자 어색함을 달래려고 차돌 숙주볶음을 뒤적거린다. 이자카야에서 만났는데, 대화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맥주잔에는 맥주가 애매하게 남아있다. 휴대폰 잠금 버튼을 눌러 시간을 보니, 한 잔 더 시키기에는 애매한 시간.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


"글쎄요"


다시 침묵. 에라 모르겠다 하며 그대로 맥주잔을 들이켠다.


"그만 일어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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