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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Jun 30. 2020

플레이리스트

정신없는 시간들이 지나가고 다시 일상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흐릿한 화면에 초점이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천장 한 부분에서부터 선명함이 번져나갔다. 정리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환불해야 할 물건이 있었는데 환불 기한이 이틀쯤 지난 후였다. 냉장고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반숙 계란과 까맣게 변해버린 바나나가 몇 개 남아 있었다. 눈을 두는 곳마다 엉망이었다. 바닥을 쓸면서 시작한 청소는 반나절을 갔다. 냉장고를 전부 들어내 얼룩을 지우고, 찬장에 잘 쓰지 않는 접시들을 꺼내서 닦았다. 오래된 면티와 수건을 새 것으로 바꾸고, 뒤꿈치가 희미해진 양말을 내다 버렸다. 한바탕 청소가 끝나고 바닥에 앉아 과탄산소다만 든 채로 밍밍하게 돌아가는 드럼세탁기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덜컹 덜컹. 덜컹. 그런 건 본 적 없지만 만약 있다면 기차가 제자리에서 헛바퀴 도는 소리가 저럴 것 같았다.


문득 지난번 광주 집에 갔을 때 어머니가 "얼굴이 참 좋아졌다"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10kg는 쪄야 들을 수 있는 말이었는데. 위기감이 몰려왔다. 화장실 거울 앞에 맨몸으로 섰다. 쓸데없이 성실하게 물때를 벗겨낸 거울에 굉장히 전통적인 실루엣이 비쳤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같은. 그 날로 무너진 식단을 다시 단백하게 바꾸고, 운동을 시작했다. 일과도 담백하게 정돈했다. 그렇게 담백단백한 5월의 끝은 스트리밍 어플의 플레이리스트 정리까지 이르렀다. 


니체는 "누구든 하루의 2/3을 스스로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노예다"라고 했다. 일할 때도 에어팟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는 덕분에 가까스로 나는 노예신분을 면천한 셈이다. 말을 좀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아무튼 음악을 많이 들으니까 플레이리스트를 꼭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몇 년 만에 목록째로 확인해보니 1,200여 곡. 귀찮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던 게 많이도 쌓여버렸다. 처음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를 벅스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쭉 써왔기 때문에 거의 15년 이상을 쌓아온 리스트였다. 몇 곡씩 빼거나 더한 적은 있었어도 완전히 갈아엎은 적은 없었다. 가장 오래전에 추가한 곡에서부터 시간 순으로 플레이리스트를 거슬러 올라갔다.


락발라드부터 시작된 그 리스트에는 시절마다 푹 빠져 지냈던 노래들이 남아있었다. 망설임 없이 지워낸 곡들도 많았지만, 한 시절을 내내 듣던 노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전주만 들어도 고막에서부터 시작된 찌릿한 느낌이 뇌간을 거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특정 시기에 새겨진 노래는 그때의 추억을 AR처럼 지금 이 자리에 덧대어놓았다. 그건 감각이라기보다는 경험에 가까웠다. 오감의 합을 넘어서는 오묘한 느낌이 그런 노래들에는 있었다. 브라운 아이즈 1집 테이프의 B면 첫 곡, 시험 보기 전에 징크스처럼 들었던 이루마의 노래들, 처음 만났던 애가 즐겨 부르던 이수영의 노래, 짝사랑하던 여자애가 불러달래서 한 달 동안 기타 반주를 연습했던 성시경의 두 사람, 대학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인디밴드들. 노래마다 사람들과의 추억도 꽤나 많았다. 그러니까 플레이리스트는 살아온 날들을 시간축으로 잘라놓은 단면 같았다. 연대표 같기도 하고, 나이테 같기도 했다.


그 단면을 더듬어 가다 보면 서늘한 추억도 있었다. 그 서늘함은 환지통 같았다. 이미 잘려나가 형체는 없는데 통증은 있었다. 지나간 연인들과 함께 듣던 노래에 이르러서는 한참 고민했다. 이걸 지워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사실 이 노래들을 다 지우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막상 지우려니 서운했다. 추억을 하나씩 더듬으며 여기까지 온 게 화근이었을까. 괜한 청승 같아서 지우려다가, 어차피 다 지난 일인데 이게 무슨 유난인가 싶어서 놔둘까 하다가. 한참을 이랬다 저랬다 했다.


차라리 오래된 추억들은 쉽게 지나칠 수 있었다. 이미 후회도 원망도 다 가셔서 다 웃으면서 돌이켜볼 수 있는 추억들이었다. 끝이 좋았건 그렇지 않았건 상관없었다. Y자 모양의 더블잭에 이어폰을 함께 끼고 들었던 그때의 노래는 그 애들을 생각할 때처럼 그냥 웃음이 나게 했다. 여전히 좋은 노래도 있었고, 이제는 유치해진 노래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렇지 못한 노래들이 있었다.


당신이 알려준 노래를 들을 땐, 진심이었지만 결국 거짓말이 되어버린 약속들이 떠올랐다. 당신을 위한 척했지만 실은 이기적이었던 선택들과 그렇게 건넸던 말들이 떠올랐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오히려 당신을 배려하지 못했고, 당신을 조금 알았다는 이유로 오만하게도 넘겨짚었다. 상담원이 상처 받을까 봐 콜센터 전화는 그렇게 예의를 갖춰서 받으면서, 먼 나라의 아이를 위해서는 울 수 있으면서, 정작 당신에게는 그러지 못했던 순간들이 너무 미안했다. 이어폰에선 영원을 약속하는 노랫말들이 계속 흘러나왔다. 왜 그랬냐고 나무라는 것 같았다. 목록에서 다 지워내고 싶었지만, 지운다고 해서 말끔히 잊힐 일도 아니었다. 미안하면 미안한 대로 고마우면 고마운 대로 그냥 두기로 했다. 언젠가는 나보다 성숙했던 당신이 가르쳐주었던 것들에 고마워하며 그 노래들을 편히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시가 많이 말하면 멋이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겉멋으로 외웠던 짧은 시 한 편을 다시 보았다. 사막에서 자기 발자국을 보려고 뒷걸음질로 걸었다던 그 짤막한 시가 이제야 조금 읽히는 것 같았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삭막한 사막을 걷는 것처럼 고독해질 텐데, 그때 기댈 곳이란 건 자기가 살아온 날들의 기억뿐이다. 어딜 보아도 황량한 모래뿐인 고립무원에서 누구의 위로도 진실로 위안이 되지 못할 때, 곧게 걷지는 못했더라도 또박또박 걸어온 길이, 거기에 발자국이 하나씩 더해지는 것만이 계속 걷게 해 줄 것이다. 굳이 발자국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 그게 비록 아주 못나게 찍힌 발자국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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