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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Jun 30. 2020

구원은 의외로 사소한 것일지도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고

생각이 정말이지 다른 사람과 마주 앉아 그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진이 빠지도록 온갖 논리와 수사를 가져다 설명해댔지만, 긴 대화 끝에 마주한 것은 하나의 벽이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던 예수님도 고개를 절레절레 지을 법한 그의 고집은 "아 그래 네 말이 맞는 거 알겠는데, 그래도 나는 싫어"로 끝났고, 어떤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근래의 가설에 하나의 논거를 보태주었다. 고맙다. 이 답 없는 인간아.


아주 빡치는 상황을 만났다가 멘탈을 회복하고 나면 으레 하는 짓.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 양껏 뱉어낸 욕설을 변제하기 위한 반성의 시간이다. 기억을 더듬어 내가 그랬던 적은 없었나 돌이켜보는데, 몇 가지 께름칙한 순간이 있었다. 언젠가의 나는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한 적이 있었고,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사무적으로 대한 적이 있었다. 보다 일상적으로는 몇몇을 직접 실천하는 이들을 예민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채식주의자에게 그랬고, 플라스틱과 1회 용품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그랬다.


"유난이네"라고 했다.


"사소한 실천까지는 존중하지만, 주변에 동참을 요구하는 건 지나친 거 아닌가. 동참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건 선 넘는 거 아닌가." 하는 모난 생각. "그래 1회 용품이, 플라스틱이, 가전제품이 환경에 좋지 않은 건 알겠는데, 안 쓰고 살 수는 없잖아?"라고 되묻는 고집. 눈을 가늘게 뜨고 "그래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며 듣는 상대방의 설득은 마음까지 와 닿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강철로 된 그 문을 연다."(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中)


신형철 평론가의 이 문장을 다시 써보자면,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이며,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굳이 문을 열지 않고 안에서부터 마음을 바꿔놓는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얇고, 쉽게 읽힌다. 그리고 잘 만들어진 이야기다. 쉽게 읽히는 한 권의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나의 시민의식이 우주적 관점에서 얼마나 후진적인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사람들 다 그렇다는 핑계는 인간이 다 그렇게 개념이 없다는 외계인의 관점으로 돌려놓았고, 한 사람의 실천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회의는 우주 너머에서 누군가 망원경으로 지켜봐 줄지 모른다는 기대로 바뀌었다. 장르문학이 문단 문학에 비해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낼 수 있었다.


변화는 현실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다지 극적이지는 못하지만, 소소한 몇 가지 변화는 있었다. 회사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 먹을 때 텀블러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손으로 쓰고 읽어야 한다는 골수 종이책파여서 멀리해오던 e북 리더기를 사려고 알아보는 중이다. 누구보다 고탄소 생활을 하던 우주적 후진 시민이 그래도 걸음마라도 하게 해 주었으니 이야기의 힘은 얼마나 강한가.


답 없는 인간에 대한 환멸에서부터 자기반성과 실천으로 나아간 이 이야기는, 결국 답이 없던 그 인간을 구원하는 액자식 구성으로 끝맺을 수 있을 것인가. 자기는 의외로 문학을 좋아한다는 그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이 책을 빌려주는 것이 이번 달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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