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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Jun 30. 2020

사랑을 복리로 받아낼 테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를 보고

"휴대폰 약정기간 2년이 모두 지나셨어요"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내 휴대폰과의 전속계약이 만기 되었으며, 이제는 새 휴대폰을 사도 된다고 한다. 그와의 이별을 그를 통해 듣는 건 어쩐지 몹쓸 짓 같아 얼른 전화를 끊고 낯빛이 어두워진 그를 보았다. 구석구석 상처가 많기도 하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니 암살의 이정재처럼 상처를 하나씩 짚어내며 자신이 나를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열변을 토해내는 것 같다.


"여기는 2018년 3월 강남역!! 여기는 2019년 6월 종로 3가!!"


굳이 그렇게 따지지 않아도 알고 있다. 우리는 지난 2년간 함께 잠들고 함께 일어났다. 숱한 날과 밤동안 마주 보았고, 이제 나는 그가 아무 이유 없이 버벅거리고 깜빡일 때에도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다. 노래를 들려주다가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잠깐 조용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스트리밍을 잠시 멈추고 3초 정도 시간을 주면 혼자서 상황을 정리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노래하곤 한다. 가끔 빨리 지치는 배터리 때문에 갈아 치워버릴까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그와의 습관들로 익숙해진 탓에 그를 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들을 떠나보내고 새로움에 온전히 사로잡힐 것이다. 이제는 휴대폰을 새로 구입하면, 전화번호부도 카톡도 어플도 사진첩도 고스란히 옮겨준다. 기록들이 아까워서 휴대폰을 바꾸지 못할 일일랑 없는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옮길 수 없는 것은 잘게 난 상처들, 슬픔이다.



슬픔은 사랑을 시작하게 할 수는 없지만, 지속시킬 수는 있다. 얄팍한 경험에 빗대어 요약해보자면, 사랑은 호기심으로 시작해 즐거움으로 나아가다가 서로의 부족함에 이유를 채우며 깊어지고, 이해한 만큼 견뎌내며 흘러간다. 사랑하는 이들은 시간의 흔적을 서로에게 새기고, 좋은 날이 지나가도 사라지지 않을 서로의 슬픔을 견디며 결속된다.


한 사람의 슬픔이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커질수록 결속은 약해지고, 불균형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면 관계는 끝이 난다. 슬픔은 이해하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이해받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므로 관계는 슬픔이 더 큰 사람이 끝낸다. (누가 이별을 말했느냐는 중요치 않다) 다시 말해, 사랑이 영속될 수 있다는 희망은 서로의 슬픔이 영원히 같을 수 있다는 기대일 것이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를 살뜰히 들여다보며 함께 슬퍼해야 한다. 사랑은 호기심을 주어로, 즐거움을 목적어로, 슬픔을 서술어로 쓰인 문장이다. 슬픔은 서사를 완성한다. 이어가는 것도 끝내는 것도 모두 슬픔의 몫이다.


스물넷의 일기에 이렇게 썼었다.

"모든 것이 새로움과 경탄이었던 어린 날로부터 꾸준히 멀어져 간다. 이제는 새로움보다 익숙함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세월이 꽤 지났지만, 세월만큼 철들지는 못했는지 여전히 같은 생각이다.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에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권태의 순간이 찾아온다 해도 나는 상처들을 쓰다듬으며 시간을 거슬러 보려 한다. 놀랍도록 매력적인 새것이 나타나더라도 그것 또한 다시 낡아지기 위해 나와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걸 알아챌 것이다. 매일을 그저 그녀를 위한 것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 하나를 몰래 저지르다가 30년이 지나 '사실은 말이야'라며 웃어 보일 수 있도록 낡은 것들을 사랑할 것이다. 나는 사랑을 복리로 받아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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