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늦여름 Aug 11. 2020

계속 쓰기

글자들로 빼곡히 채워진 모니터 화면을 보며 잠시 뿌듯했지만 그 뿌듯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얘넨 모두 살아남지 못할 애들이었다. 쉽사리 진도가 나가지 않아 생각나는 대로 일단 쓴 것들이었다. 그래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키보드 위에 손가락만 나란히 정렬해둘 때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한글은 참 아름답구나. 자음과 모음이 제자리에만 있어도, 오타만 없어도 이렇게 보기 좋은 것을... 비문도 생명인데 이걸 지워야만 하는 걸까... 상념이 길어지려던 찰나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우연히 건질 문장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 문장 또 한 문장. 잠시 후 한숨을 몰아쉬고 백스페이스를 눌렀다. 세게 누르면 더 깨끗하게 지워질 것처럼 꾸우욱 눌렀다. 커서가 입을 벌리고 맹렬하게 글자들을 먹어갔다. 






모두 우연이었다. 돌잡이 때 붓을 잡았다던 갓난애가 자라서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고, 다시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어른이 되기까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가계도를 몽땅 뒤져봐도 책과 친한 사람이 없었다. 잠깐 서점을 했던 큰 이모가 그나마 친활자 파였지만. 그런 이모마저도 IMF 때 서점이 망한 뒤로는 가장 열성적인 활자 혐오자가 되며 이 집안에 책이 설 곳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집구석에서 자라나 나이 서른도 넉넉히 넘어선 여태껏 늦은 시간까지 글을 쓰겠다며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건 지독한 우연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용돈을 쪼개서 몰래 책을 사다보았던 불온의 시절. 그 시절을 지나오며 책사랑은 더욱 애틋해졌고, 분출할 곳 없었던 애정이 억눌려있다 불거져 나온 게 글쓰기였다. 문예반 손윗선배들이 으레 하는 말처럼 많이 읽는 애들은 쓸 수밖에 없었다. 말하다 보니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것도 같지만, 삶에 대해서라면 우연이 곧 필연이므로 그냥 아울러 연이 닿았다고 해두자. 글쓰기와 연이 닿아 나는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악연이었다. 시작은 즐거웠지만 그 후로는 내내 괴로웠다.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조급했으나 글은 더디게 늘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가끔 번뜩이는 생각에 이거다! 하고 써내리는 날에도 결과물은 시궁창이었다.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독서도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었다. 더 잘 쓰기 위해서 잘 읽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요리는 맛을 잘 보는 사람들이 잘한다는 것처럼, 음악은 듣는 귀가 좋아야 잘한다는 것처럼, 좋은 글을 보는 눈이 있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남들의 좋은 글을 찾아다녔다.


그 시절 짜릿함을 주었던 글은 작가들의 글이 아닌 또래의 그것이었다. 재능 있는 친구들의 글을 읽는 건 짜릿하면서 동시에 괴로운 일이었다. 걔넨 내가 끝끝내 써내지 못했던 걸 대수롭지 않게 써냈다. 그중에서도 유독 빛나던 친구가 있었다. 놀랍도록 싸가지가 없었지만, 걔가 쓴 글을 볼 때면 우호적인 감정이 솟아났다. 어쩌다 이런 개차반한테 이런 재능이 주어졌는지 개탄하면서 교지든 싸이월드든 어느 지면에 쓴 조각 글이건 죄다 찾아보았다. 걔가 쓴 글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랬다. 빛이 났다. '빛난다'는 말만큼 재능을 제대로 형용하는 단어는 없다. 재능은 누군가에게 광원을 빚지지 않고, 항성처럼 고고히 빛난다. 중우한 여럿 사이에 묻혀있어도 그곳에 그들이 있음을 기어코 알리고 만다. 아니, 알려진다고 해야 정확하겠다. 아름다운 것들이 대개 그러하듯 재능도 피동이다. 스스로 알려지고자 하는 욕망이 없으므로 재능은 언제나 그들을 알아보는 자들의 의해서 알려진다. 불행하게도 나는 재능을 잘 알아보는 쪽이었다. 


"넌 글이 갈수록 구려지냐."


나름 글에 때깔 좀 나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 친구로부터 한방 얻어맞았다. 내가 사람을 보긴 제대로 봤다. 참 싸가지가 없고 또 예리한 친구였다. 모방은 창조네 어머니였고, 실패는 성공이네 어머니였지만, 나는 그 자제분들과 친해지지 못한 채 두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주구장창 모방하고 실패했다. 미술시간에 배웠던 색의 혼합이 생각났다. 빛은 색이 혼합될수록 하얘지지만, 물감은 섞일수록 까매진다던. 내 글은 물감이 너저분하게 섞인 팔레트 같았다. 뛰어난 애들의 글에서 훔친 문장들이 뒤죽박죽 섞여 본래의 빛을 잃고 탁해져 있었다. 재능 있는 친구들처럼 잘 쓰고 싶다는 조바심이 글을 망쳐놓았고, 그 하얀 종이 위에는 욕망의 물성이 물감처럼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이생폭망이라며 고이 보내주기엔 글쓰기를 이미 너무 좋아해 버렸다. 고민하다가 걔한테 다시 찾아가서 물었다. 어디가 그렇게 구렸냐고. 답지 않게 잠깐 말을 고르더니 말했다. 


"남들거 따라 하지 말고 그냥 너 쓰던 대로 써. 그게 훨씬 나아."


100% 납득이 가는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계속 썼다. 쓰다 보니 차근차근 덜어내야 할 것들이 보였다. 박민규를 보고 쓴 글은 박민규 같았고, 천명관을 보고 쓴 글은 천명관 같았다. 아무튼 예리한 자식. 고마움과 질투를 한껏 담아 욕지거리를 하고, 또 썼다. 잘 알지도 못하는 감정들을 흉내 내는 짓. 그럴싸해 보이는 문장을 껍데기만 가져다 쓰는 짓. 논리 없이 문체만으로 논리적인 척하는 짓. 좀만 들여다봐도 실체가 없는 맹한 아포리즘. 훔쳐온 것들을 덜어내고 계속 쓰다 보니 개중에 유난한 내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활자를 모두 지운 커서는 깜빡거리지도 못하고 첫 줄 왼쪽 끝 벽을 밀고 있었다. 잘못도 없는 커서한테 뭔 짓인가 싶어서 얼른 백스페이스를 놔주었다. 도로 백지가 된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래 고민될 때는 나다운 게 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어떻게 보일지. 누가 뭘 좋아할지. 고민하지 말고 나답게. 




작가의 이전글 변하는 친구를 바라보는 30대의 어느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