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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Aug 25. 2020

가까스로 여름

긴 장마가 가고 가까스로 여름이다. 사무실 통유리창 밖으로 쨍하게 푸른 하늘보이는 진짜 여름. 점심시간에는 서둘러 식사를 해치우고 청사 뒷길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었다. 비가 그친 지 반나절이 채 되지 않았는데 바깥은 습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한껏 들이킨 숨을 타고 볕에 바싹 말린 빨래 같은 싱그러운 향이 들어왔다. 그렇게 청량함도 잔뜩 채운 데다가 일거리도 없어서 느긋한 오후. 이런 회사라면 다닐 만도 하겠다고 낙관하던 찰나였다.


"이것 좀 검토해 봐"


철퍼덕


철퍼덕? 보고서가 철퍼덕? 정체가 뭔가 싶어서 봤더니 200장쯤 되어 보이는 종이 묶음이 놓여있었다. 서류더미를 보고 눈을 돌려 다시 계장님을 바라보았다. 순수하게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아서.


"새로 오신 임원분 자서전인데, 니가 좀 봐봐. 한번 해봐서 잘 알잖아"


어차피 따져봤자 돌아오는 건 최소 통사정 최대 역정이었으니 말을 아끼기로 했다. 스윽 훑어보기만 해도 누구의 잘못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 계장님이 무슨 잘못이겠어요. 이건 평생직장에 한 몸 바쳐온 50대 아저씨가 퇴직을 앞두고 남기는 마지막 인정 욕구의 불꽃이었다. 그래. 인류애다. 인류애. 인류애를 담아서 해보는 걸로. 그러나, 인류애를 삼창해도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하나 남아서 그건 물어봐야 했다.


"근데 남이 써주면 자서전이 아니라 평전 아니에요?"


직장에서 순간적인 몰입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에어팟부터 낀다. 집중의 가장 큰 적,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소음본질은 높낮이나 크기, 불규칙성이 아닌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 내가 원하는 소리로 덮어버리면 소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스트리밍 어플을 켜고 한 곡 반복으로 노동요를 재생한다. 제목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일본판 슬램덩크 애니메이션의 엔딩곡이자, 불꽃남자 정대만의 테마곡으로도 유명한 노래. 농구장 바닥을 때리는 듯한 시원한 드럼 소리에 농구밑창의 마찰음 같은 기타 소리가 얹히면 금세 몰입된다.


신디, 드럼, 기타, 보컬, 믹싱까지 모든 게 90년대의 표준화석 같은 그 음악을 따라 듣다 보면 어느새 눈 앞에는 90년대 일본의 어느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 펼쳐진다. 전국대회를 앞둔 여름의 어느 날, 부원들과의 연습을 위해 학교로 향하는 길. 한 손에는 헐렁한 농구복이 든 더플백, 손에는 워크맨이 쥐어져 있다. 같은 학교 여학생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시작한 농구였지만, 어쩐지 요즘 자꾸만 농구 자체에 진지해진다. 그때 그쪽으로 패스했더라면, 그때 체력이 조금만 받쳐주었더라면. 머릿속으로 지난 시합의 아쉬웠던 순간을 복기한다. 나도 모르게 이기고 싶다는 의욕을 다진다.


슬램덩크는 주인공 강백호가 고등학교에서 보내는 첫여름의 이야기다. 중학교 시절부터 손꼽히는 문제아였던 강백호는 고등학교 입학 첫날 농구를 좋아하는 채소연에게 첫눈에 반하고, 순전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농구부에 입부한다. 농구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 공놀이 따위에 그렇게 열심인 농구부원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부원들과 함께 아쉬운 패배와 뜨거운 승리를 겪는다. 코트 위에 선 모든 이들이 절실하게 노력했음을 알게 되고, 코트 위에 설 수 없었던 후보 선수들의 질투 없는 응원을 받는다. 관객들의 야유가 환호로 바뀌는 농구장의 열기 속에서 강백호는 점점 이기고 싶다고 열망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좋은 농구선수, 그리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그렇게 봄과 여름을 한해살이 풀처럼 왕성하게 성장해가던 강백호는 전국대회 3차전 산왕공고와의 경기에서 선수생명에 지장이 갈 수도 있는 큰 부상을 입는다. 모두의 열망이 담긴 중요한 시합의 종료 직전, 부상으로 쓰러져 코트 바깥에 누운 채 지난 4개월을 돌이켜본다. 이내 자신이 농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고 벌떡 일어나 채소연의 어깨를 붙잡고 말한다. 4개월 전 농구를 좋아하냐고 물었던 그녀의 질문에 이제야 비로소 진심으로 대답한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진짜라구요" 그 순간 여름은 가장 쨍하게 빛난다.


그해 여름은 그렇게 잘 못 쏜 화살이 우연히 과녁에 들어맞으며 끝난다. 슬램덩크가 명작으로 손꼽히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강백호의 성장이다. 여자애에게 잘 보이려고 시작한 농구가 정말로 좋아져 버린 이야기. 청춘과 가장 닮은 생명력이 넘실거리는 계절, 여름과 함께 무르익고 끝나는 덕분에 슬램덩크는 더 명작이 될 수 있었다. 진실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엔딩에 담긴 비화도 있다. 당시 일본 스포츠계는 프로야구가 꽉 잡고 있었는데, 순전 슬램덩크 때문에 농구의 인기가 야구를 추월해버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야구협회에서 슬램덩크의 작가인 이노우에에게 압박을 넣어 다급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썰. 마냥 없는 얘기 같지도 않은 게 전국대회에서 언젠간 맞붙을 것처럼 상대들을 공들여 보여주었지만, 그들과 만나지도 못한 채 급마무리던 점은 아무리 보아도 이상하다. 아무튼 당시에는 찝찝한 결말이었지만, 그 결말이 지금에 와서는 역대급 엔딩으로 손꼽히고 있다. 게다가, 강백호, 채치수, 서태웅, 정대만 같은 한국판 캐릭터들의 찰떡같은 이름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90년대 초에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이라 일본 이름을 그대로 쓰지 못했었고, 그 때문에 한국식으로 바꾼 것이 오히려 캐릭터들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어주었다. 슬램덩크라는 작품은 이렇게 안팎으로 가리지 않고 청춘을 닮았다. 기회건 고난이건 들이붓고 나면 성장의 밑거름으로 만들어버리는 청춘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사무실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이 힘든 글을 읽고 있다. 도의적으로 해야 할 일도 아니고, 내용도 참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남의 자서전을 읽고 고치고 보탠다. 구린 글에도 뭔가 건질 건 있겠지. 굽었던 허리를 펴고 도끼눈을 풀고 들여다본다. 청춘도, 승부욕도, 열의도, 잘 보이고 싶은 여자애도 없는 이 사무실에 슬램덩크 비지엠 하나 덧씌워졌을 뿐인데, 잠시 여름의 원액을 담은듯한 만화에서 흘러나오는 싱그러움에 물든다. 그 와중에도 재난문자가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여전히 좋을 것 하나 없는 여름이지만, 마음은 가까스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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