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형이 오랜만에 소개팅을 앞두고 난감해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오랜 연애 후에 그만큼 긴 후유증을 앓고 있었던 형이 소개팅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신이 나서 일단 막 응원만 해주기로 했다. 소개팅이 뭐 대수야. 가서 그냥 형 있는 그대로 편하게 보여주고. 궁금하면 한 번 더 보자고 하고. 계속 보다 보면 사귀는 거고 그러는 거지. 결과는 예상대로 잘 되지 않았다. 잘 되었다면 이렇게 글로 쓸 이유가 없었겠지. 얼마 뒤에 다시 만난 형은 도통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며 대화가 툭툭 끊기더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무슨 얘길 했는데"
"그냥 내가 책 읽는 거 좋아하고"
"그리고"
"약간 문학 편식이 있고"
"얼씨구"
"글 쓰는 것도 좋아한다고 했지"
솔직한 줄이야 알았지만 그만큼 요령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기에 새삼 놀라서 뜨악질을 해 보였다. 턱관절의 가동범위를 최대한 활용해서. 그리곤 막 나무랐다. 자꾸 눈만 동그랗게 뜨지 말고 이 사람아. 이 취미생활이 독서라고 할 사람아. 감성적인 에세이 쓰는 문학 장년이라고 첫 만남부터 패를 다 까보이면 어떡하냐고. 부담스럽게. 왜 통장 잔고도 공개하지. 아니. 거짓말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건 친해지면서 차차 얘기해도 늦지 않다고.
"야 그럼 무슨 얘길 하냐"
"그냥 편한 얘기 해. 영화. 여행. 노래. 이런 거 많잖아. 정 뭐하면 코로나 얘기하고. 진짜 그렇게 책 얘기 안 하면 죽을 것 같으면 딱 두 작품만 기억해. 문학은 페스트 비문학은 총 균 쇠. 코로나 때문에 봤습니다. 끝!"
"야, 문학 좋아하고 글 쓰고 그러는 게 죄냐?"
"첫 만남에 얘기하는 건 죄지. 도박죄. 상대방도 관심이 있으면 대박. 아니면 쪽박. 확률을 고려해보면 사행성이 심각한 도박이야."
그러게나 말이다. 문학을 좋아하고. 심지어 그런 문학을 직접 쓰고 싶어 한다는 게 그렇게 유난스러울 일이었을까. 누군가는 운동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처럼 단순히 기호일 뿐인데. 직장에서 사무실 사람들과 취미생활을 이야기할 때를 생각해보면 요지는 더욱 명료해진다. 가령 이렇다. 주말에 골프 치러 필드를 다녀왔다. 꽤나 사회적인 사람이구나. 애들이랑 캠핑을 다녀왔다. 가정적이네. 와이프가 친정 가서 오랜만에 게임을 하루 내내 했다. 그게 진짜 휴가지. 저는 글 썼어요. 글이요? 아.. 그러시구나..
사실 나도 형과 같은 마음이다. 왜! 글쓰기가 뭐! 왜!
그렇게 담아둔 고민이 이 책 <쓴다면 재미있게>를 읽으면서 몇 번이고 불거졌다. 첫 장부터 그 순간이 왔다. 장르문학을 무시하는 순수문학 종사자들. 그러니까 과제물로 장르문학을 제출하면 안 되냐는 질문에 대답조차 해주지 않던 문창과 교수님과 서사보다는 인문성과 문장에 천착하는 작가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문학이 비호감이구나. 문학은 너무 젠체하는구나.
그리고 정세랑 작가가 떠올랐다.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양 쪽의 경계에서 활발한 창작을 이어나가는 정세랑 작가님. 정세랑 작가는 순수문학을 문단문학이라고 부른다. 정확히 페어링 하자면 순수문학-장르문학, 문단문학-대중문학이 옳지만, 굳이 문단문학-장르문학으로 묶어서 언급한다. '문단문학'이라는 단어는 비호감이 담겨있다. 문단에 등단한 작가들이 쓰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재미없는 소설들. 그런 플롯 없는 예쁜 소설들. 지나친 서사성은 통속적이라고 얕잡아보는 권위 있는 문학상에 입상한 단편들처럼 말이다. 정세랑 작가가 직접적으로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지 밝힌 적은 없지만, 순수문학을 굳이 문단문학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장르문학 쪽에 마음이 기우는 것 같다.
<쓴다면 재미있게>의 두 번째 장부터 13개 챕터 내리 이어지는 조언들은 모두 소설을 쓰기 위한 것들이다. 나는 주로 에세이를 쓰다 보니 에세이에 도움이 될 만한 구절이 있을까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숙독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서사나 캐릭터, 대화 같은 조언들을 에세이에 대입하다 보면 결과물은 자전적인 소설이 나오는 것이었다. 기실 에세이를 쓰다 보면 단편 소설로, 단편소설은 다시 장편소설로 나아가기 마련이라는 작가들의 경험담이 옳았다는 게 다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소설로 나아가지 않고 왜 에세이만 쓰고 있을까?
재능이 모자라서? 노력이 부족해서? 소설을 쓸 자신이 없어서? 에세이 자체로 얻는 효용이 있어서? 모두 한 면씩 옳았다. 대개 진실은 다면체이므로 모두 옳은 이유였다. 허구를 상상해 내기에는 재능도 노력도 부족하고, 그러니 소설을 쓸 자신이 없었다. 소설을 쓰면 굉장히 구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작가들은 장편을 쓸 때 몇 달 몇 년을 한 세상에 푹 빠져있다가 나온다고 한다. 자신이 창조해 놓은 세상 속에서 등장인물이 되어 상황을 상상하고, 이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하고 대화할지 기록해낸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예민한 사람과 무던한 사람이 나누는 대화, 상처 받은 사람의 표정과 말투, 평소라면 하지 않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캐릭터들을 설득해내기 위한 내면 서술. 이런 것들을 쓰기에 나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모자랐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에세이를 계속 쓰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의 고민을 들여다보고, 밑바닥을 헤집어내고, 그것들을 최대한 예쁘고 멋진 문장들로 담아내면 충분하니까. 그러고 보면 에세이는 참 나르시시스트적인 장르다. 나만 열심히 들여다보면 제법 괜찮은 것들을 써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 이 조악한 의문과 답변들을 조금 더 상냥하게 정리해서 형에게 알려주어야겠다.
"형. 문학을 좋아한다는 말은 잘난 척하는 것 같고, 에세이를 쓴다는 말은 자기애가 엄청나게 강해 보여. 둘 다 소개팅에서는 최악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