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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여름 Oct 15. 2020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아

어릴 적 만화영화 속 세상은 선과 악이 뚜렷했다. 악당은 딱 봐도 악당이었다. 일단 비주얼부터가 음침했는데, 입을 열면 더 확실해졌다. 말도 많지 않은데 하는 말은 다 나쁜 말 못된 말에, 웃어도 꼭 거센소리를 골라서 웃었다. 크흐흐흐. 그런 그를 응징하는 주인공은 언제나 밝은 편에서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의로운 대사는 덤. TV 볼륨을 꺼놔도 누가 주인공인지 누가 악당인지 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간 입을 크게 벌리고 뻐끔뻐끔 밝고 명랑한 기운을 풍기는 쪽이 주인공, 거의 복화술 수준으로 입을 앙다물고 표정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쪽이 악당. 내가 악당이어도 화가 날 일이다. 누구는 날 때부터 선하고 정의롭고 빛나는 편이고, 나는 음침한 조명에 성의 없는 디자인. 그나마도 옷도 잘 안 갈아 입혀준다. 촬영장의 반사판이라는 반사판은 죄다 주인공한테 몰아주는데, 악당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을 도리가 있나. 어째서 맨날 세상 망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건지도 이해할 만하다. 



이제 보니 주인공들도 참 그래. 그렇게 착하면 악당 마음 헤아려 줄 법 한데 그냥 두드려 패기만 했다. 하나같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고, 악당과 마주치면 문답 무용 폭력부터 가했다. 뭘 지키려는 것 같긴 한데, 그걸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사실 싸움이 시작되면 이유 따윈 뒷전이다. 줄창 먼지 나게 팬다. 악당에게 탁월한 것이 있다면 내구성, 맷집이다. 허구한 날 뚝배기가 터지고도 다시 찾아와 또 맞는다. 그렇게 맨날 맞는 걸 보면 쟤네가 왜 저렇게 당해야 하는지 궁금할 법도 한데, 우리 중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TV 한 발짝 앞에서 쪼그려 앉아있던 아이들은 근시가 오는 줄도 모르고 권선징악의 맛에 취해 환호할 따름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편을 갈라서 놀았다. 뭘 하든 일단 편은 나누어놓고 시작했다. 그렇게 적당히 편이 나뉘면 우리 편이 '착한 놈'이고 너네는 '나쁜 놈'이라며 맥락 없는 마타도어를 날려댔고, 같은 편 아이들 사이에서는 반대급부로 뜨거운 동료애 같은 게 감돌았다. 어른의 상식으로는 그쯤 되면 서로 '착한 놈'의 적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싸울 법도 하건만, 왜 너희들이 '착한 놈'을 하려 하냐고 따지지 않고 그냥 서로 할 말만 했다.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주인공 1인칭의 세상 속에서는 경쟁이 중요치 않았다. 그땐 우리 편이 언제나 착할 줄로만 알았다. 나는 언제까지나 주인공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12년의 의무교육을 받는 동안 친구들을 만나고, 계속 주인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빛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무대를 똑 닮은 사각형의 교실 안에서 우리는 선악과를 나누어 먹고 숨 쉬듯 경쟁하기 시작했다. 경쟁은 불가결했다. 부쩍 자란 몸과, 웃자란 몸을 따라 부풀어 오르는 자아는 서로 부대낄 수밖에 없었다. 비좁은 교실 속에서 내몰리지 않기 위해서, 그 속에서 자신의 몫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승리해야 했다. 그 길을 쭉 따라 대학으로, 직장으로 한 발짝씩 내딛는 동안 동료애니 진실이니 사랑, 우정, 정의니 하는 낯간지러운 말들은 몰래 내다 버렸다. 고단한 길을 가려면 몸을 가벼이 해야 했고, 순수를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쓸모없음이었으므로.



화요일이었나. 목요일이었나. 기분이 좋지도 특별히 지치지도 않는 평범한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잠들기 전에 유튜브를 켰다. 그곳에는 주인공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무대 위의 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에 따라 한 사람의 관객이 되어 웃고 혼잣말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영상 재생이 끝나고 화면이 까매졌다. 그 검은 화면에 얼굴이 비췄다. 거기엔 출퇴근에 찌든, 그저 모순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버거운 일에는 지치고, 후회할 짓을 매번 저지르는 한 장년 남자가 있었다. 여전히 선한 것들을 보면 좋아하지만, 스스로는 선하게 살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겁쟁이. 어떨 때는 모순적인 자신의 모습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선한 것들을 불편해하는 엑스트라 마을 주민들 중 하나쯤. 저런 애들이 더 구린 구석이 있더라며 흠집만 잡는 보통의 못난 사람. 주연이 뭐야. 살아보니 조연도 따내기 어려운 게 인생이었다. 



그래서 요새 빌런들에 자꾸 눈길이 가나보다. 어려서 이유없이 미워한 게 미안했는지. 살다보니 그네들 입장이 더 이해가 가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보다는 악당들의 마음에 몰입이 되는 요즘이다. 고된 스턴트는 혼자 다하고 구석에서 주인공에 쏟아지는 핀 조명을 보아야만 하는 악당들. 포켓몬을 동료로 대해주던 로켓단, 꾸러기 수비대에서 쥐의 농간으로 십이간지에서 밀려난 고양이 마녀, 오갈 곳 없어 거둬준 둘리가 쳐놓은 깽판을 수습하기 바빴던 고길동 아저씨, 조금 허세만 있다 뿐이지 동물을 사랑하고 결국 지구를 구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던 미스터 사탄. 이유 없이 미워했던 그들이 얼마나 고됐을지. 혹은 속상했을지 마음이 쓰인다. 



정신을 차려보니 곧 자정. 2D 걱정은 그만해야 할 시간이었다. 평소처럼 내일 출근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올려보았다. 어떤 업무, 어떤 회의, 어떤 보고, 어떤 사람, 사람, 사람. 직장 고민은 늘 사람으로 끝났다.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버티기 위해 출근을 하는 것 같았다. 매사 불만에 늘 화가 울대까지 가득 차서 단추 하나 툭 누르면 화르륵 타오르는 핫팩 같은 선배, 어떻게든 업무에서 빠져보려고 눈치만 보고 있는 옆 자리 누구, 유연근무 한 번 썼다고 몇 날 며칠을 꼽주던 상사. 내 만화영화 속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악당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언젠가 야근을 마치고 회사를 나서는데, 한쪽 구석에서 통화하는 상사를 본 적이 있다. 난생처음 보는 살가운 목소리로 아이들과 통화하던 모습이 얼마나 낯설던지. 곧 들어가겠다며 아빠 기다리라던 그의 얼굴이 동글동글 귀여워 보여 뜨억 했던 순간이었다.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햇수로 3년을 함께 일했지만 직장에서 꼬장꼬장한 상사라는 것 말고는 어떤 사람인지 관심을 가져본 적 없었구나 하는. 저 사람도 사무실에서야 나한테 일절 도움이 안 되는 꼰대지만, 아내에게, 자식에게, 부모, 친구에게 모두 다른 모습일 텐데. 나처럼. 



다들 그냥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그들처럼 나라는 모순적인 인간도 누군가의 삶 속에서는 악당이 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제 와서 빛나는 주인공이 되기도 힘들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애를 쓴다면 그저 나라는 인간이 왜 이렇게 모순적인지 더 고민하고, 남들도 나만큼이나 모순 속에서 하루를 살아간다는 이해를 더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이해가 이해를 낳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솟대 삼아 세우고, 편협한 마음에 울컥 미운 마음이 들 때마다 되뇐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야. 저들은 악당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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