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겨울바다,
들리는 건 파도가 내는 소리, 지나는 바람 소리뿐이고 짠 냄새를 머금은 공기를 휘감고 있는 해변가에 서있는 상상 해 보았다. 아무렇게나 괴롭히는 걱정들도 나서지 못할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 풍경을 만나고 싶었다.
귤밭에서 봄 여름 가을을 나고 조천 바닷가 집에서 겨울을 보냈다. 해녀를 하던 할머니는 늘 내게 먼 나라 미국에 가서 살아보라고 하셨다. 나에게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는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먼 나라로 가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할머니와 덮칠 듯 내리 치는 파도를 보는 시간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겨울 제주바다는 그리움이 무엇인지 적확하게 일깨워주는 대상이었다. 쉴 새 없이 파도는 내게로 밀려왔지만, 내가 기다리는 사람들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 마당에 채송화가 꽃이 피었고, 다시 귤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육지로 나온 나는 바다가 너무 멀어졌다.
시험 점수가 엉망이면 어쩌지?
월급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지?
결혼을 못 하면 어쩌지?
아픈 몸이 나아지지 않으면 어쩌지?
애를 잘 못 키우면 어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어쩌지?
여러 단계의 걱정들을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쓰지 못하면 어쩌지?'가 고민이다. 하루쯤 쓰지 말까 싶기도 하고, 아무리 써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못 쓸 때도 그렇다. 요즘은 두 가지의 의미가 다 담긴 걱정을 한다. 그렇게 들어오고 싶은 세계였지만 매일 써야 한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오히려 나를 의기소침하게 한다.
자신감이 떨어질 땐 책 속에 살고 있는 작가들을 만나면 해결되기도 한다. 바로 책 읽기다. 방금 전까지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텍스트를 읽기 시작하자 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보통은 잘 듣는 진통제 목록처럼 편애하는 책이 정해져 있지만, 요즘은 모든 작가의 책이 효과가 있다. 글 쓰는 시간이 늘어나자 작가들에게 더욱더 깊은 존경심이 생겨났다.
나만의 글쓰기는 점수를 받지 않아서 좋았다.
하얀 여백에 무늬처럼 글이 쓰이면 자화상처럼 내 것이 되었다. 온전히 내 얼굴이 그려진 적당하게 주름이 있고, 꾹 다문 입술이 하고 싶은 말을 가둔 채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내면이 차란차란 잔잔하게 물결치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누구도 모르게 나만 아는 사연을 겹겹이 물속에 녹여버리면 그만이었다. 자화상을 몇 번이나 그릴 수가 있었다. 숨겨둔 것들은 나만의 단어가 되었으니 부끄럽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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