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하늘에 날씨까지 따뜻한 공기로 겨울을 잊게 했다. 집 뒷산을 오르면서 향긋한 커피 한잔이 생각났다. 예전 같으면 당장 카페로 달려가 카푸치노 한잔을 들고 나왔을 텐데, 산 둘레길을 더 빨리 걷고 싶었다. 산 넘어 구립도서관에서 빌려볼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기분이 좋아서 산행을 하는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산은 아직 모든 것이 갈색이지만, 몇 주후면 진달래꽃이 찾아올 것이다. 지난봄에 찍은 사진처럼 눈부신 풍경을 곧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들었다. 진달래는 잎이 아닌 꽃부터 피지만, 주변에 연둣빛 새싹이 돋는 나무들이 있어서 분홍색이 더 돋보였다. 막 피어난 꽃잎과 나뭇잎은 얇고 투명해 태양이 비추는 빛이 그대로 통과하며 반짝였다.
새싹이 돋는 나무와 진달래 꽃 @songyiflower (2020년)
반대쪽에서 산행을 나오신 할아버지 두 분이 보였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나누며 지나가는 모습에 예전 일이 떠올랐다.
산 아래에는 카푸치노를 잘하는 카페가 있었다. 커피를 들고 도서관에 갈 참이었다. 카페에 들어가 보니 할아버지 두 분이 먼저 주문을 하고 계셨다. 캐러멜 마키아또 두 잔과 와플을 시키셨다. 현금을 꺼내 함께 계산하셨고, 자주 오시는 듯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으셨다.
두 분을 보며 놀라고 있는 나를 느꼈다. 커피 마시는데 무슨 나이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와플을 사이좋게 주문해서 드시는 할아버지는 처음 봤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셨다. 신선함을 느꼈다. 서로 돈을 내려고 실랑이도 부리지 않고, 평소 먹던 스타일로 주문해서 드시는 듯한 모습에 더 놀란 것 같다.
몇 해 전 피자집에서 비슷한 상황을 본 적 있다. 중절모를 쓰신 할아버지 두 분은 피자와 샐러드를 맛있게 드시며 계산하고 나갈 때까지 내 시선을 붙잡았다. 할아버지들은 정말 연세가 많으셨다. 백발머리에 몸은 살짝 마르셨지만 어딘지 모르게 건강해 보이셨다. 게다가 서로 존칭을 쓰시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셨다.연세 드신 분이라서 국물로 요리된 음식을 드실 거라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지고, 평소에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분들이구나 싶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편견과 세대차이를 스스로 만드는 고리타분한 스타일이었다. 놀랄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분들이 드시던 음식이 젊은 사람들만 즐길만한 음식이라고 생각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어느새 둘레길 아래 도서관이 보였다. 도서관에 들어가며 엉뚱한 상상을 했다. 스무 살 남짓된 젊은 (^^) 분들이 훨씬 더 많은 열람실에서 문득 내 나이가 신경 쓰였다. 모두들 나보다 한참은 어려 보였다. 열람실을 오가는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내가 도서관을 찾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닌가 싶었다. 혹시 거기서 만난 학생들이 내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진실은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였다. 도서관은 언제 가도 마음 편안하게 반겨주는 곳이고, 늘 터줏대감처럼 열람실에서 책을 보시는 지긋하신 분들도 계신다. 돋보기를 쓰시고 조용히 책을 보는 모습을 닮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젊은 날을 추억하기보다는 앞으로 올 미래를 상상해본다.
방금 전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예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