놔두면 잘 커요

튤립은 긴 겨울을 잘 견뎠네요

by 무쌍

수변공원에 작은 연두색 잎이 지어 솟아났다. 지바른 곳이라 3월 중순인데도 연두색 꽃 봉오리가 보이는 것도 있었다. 바로 튤립이었다. 튤립은 공원 빈 공터에 팻말도 없이 지난가을과 겨울을 버틴 것 같다.

일주일 후에 다시 찾은 그곳은 색색이 튤립 꽃밭이 되어있었다. 잎은 진한 초록이 되었고 꽃송이들은 알록달록 물들 제각각 피었다.

지나던 누군가 "언제 심었데? 심은 줄도 몰랐구먼. 어떻게 하루아침에 꽃을 심어놨데?" 놀라서 말했다.

그런데 같이 있던 분이 "작년에 미리 심어놓거야."라고 말했다. 그분 말대로 튤립은 가을에 미리 심어놔야 다음 해 봄에 꽃을 볼 수 있다.


수변공원의 튤립 @songyiflower인스타그램

꽃을 키우며 사는 건 마당이나 있어야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나마 키우는 화초들이 보여주는 꽃에 감사하며 살았다. 어느 날 정원이 딸린 집에 사는 날이 금방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졌다. 다가 분에 꽃을 키우면 되는데 너무 큰 미래를 걸었던 것 같았다.^^;

마트에 파는 꽃씨 봉투를 살펴보며 난이도가 가장 낮고, 발아율이 가장 높은 백일홍 씨앗을 샀다. 씨앗 봉투에 쓰인 파종 시기에 맞춰 으니 싹은 금방 올라왔지만 웃자라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살던 집은 16층 아파트였다. 땅의 기운을 느끼기엔 너무 고층이었다. 대신 비 내리는 날은 베란다 창을 크게 열고 빗물을 맞게 하며 자연을 느끼게 해 주었다.

꽃이 피기까지 백일홍의 눈치를 보며 돌보는 건 아이들을 키우는 육아만큼 힘들었다. 그래도 백일홍은 착실하고 예쁜 꽃이었다. 매년 꽃이 피어 씨앗으로 남았고, 씨앗은 다시 사지 않아도 되는 알뜰함도 갖춘꽃이었다. 5년 넘게 핀 꽃송이만큼 천천히 이자도 붙어, 백일홍이 남긴 씨앗은 화단 몇 개를 만들 수 있을 만큼 많아졌다. 백일홍 키우는 건 매년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매년 다르게 나를 긴장시키고 즐겁게 해 주니 꼭 짓궂은 아이들 마냥 느껴졌다.


낮동안 찬기운이 사라지자 베란다 꽃밭 만들기를 서둘러야 했다. 개화기에 맞춰 꽃을 보려면 미리 심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빈 화분들을 정리하고 새 흙을 사 왔다. 키워진 모종을 사 오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심어 꽃을 보기 위해서다. 꽃을 빨리 보고 싶어 3월이 되자마자 거실에서 씨앗을 발아시켰다. 늦어도 4월 중순이 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한다. 날이 더워지면 병충해가 생기고 꽃을 보기도 전에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로운 꽃밭을 위해 꽃씨 3종 세트 씨앗 봉투를 샀다. 꽃씨를 계란판에 넣어 발아를 했는데 가장 먼저 나팔꽃 싹이 올라왔다. 그리고 얼마 후 눈에 보이지 않은 만큼 작은 채송화 싹이 났는데 일주일이 지나니 참깨 알만큼 자랐다. 봉선화는 감감무소식이더니 가장 늦게 싹을 피우고 있다.

싹이 어느 정도 자라면 화분에 옮겨질 텐데, 주인은 벌써부터 핀 꽃을 상상한다. 렇다고 꽃을 본다는 장담은 할 수 없다. 물 주기를 놓치거나 자칫 벌레가 생기는 경우도 있어서 두 달은 지나야 성공 여부를 알 수 있다.


꽃을 보려면 내가 뿌린 씨앗보다도 더 한참을 미리 심어야 볼 수 있는 꽃도 있다. 초봄에 예쁘게 피는 구근 식물들이다. 추수가 끝나면 밭은 빈 땅이 되지만, 정원사들의 꽃밭엔 구근들을 심어야 하는 가을이다.

동화작가인 타샤 튜더는 <탸샤의 정원>에 그녀만의 튤립 구금 심는 법이 있다.

가을마다 타샤는 털옷을 껴입고 단단한 삽을 들고나가 구근을 심었다. 매년 가을 그녀가 구입하는 구근의 양은 2천 개가 넘는데, 배달된 구근을 이미 땅에 심어져 있는 구근들 사이 빈틈에 서너 개씩 넣는다. 봄이 되면 빽빽하게 무리 지어 핀 튤립을 보기 위해서였다. 매년 타샤는 심는 구근의 종류를 늘렸다. "겨울마다 들쥐들이 가져갈 몫도 챙겨줘야지요."
그녀는 구근을 많이 심는 것을 그런 식으로 변명했다.
- <탸샤의 정원> 중에서

숲 속 집에 사는 그녀는 다람쥐 나 쥐, 사슴이 먹어버리지 않게 집 앞 가운데 자리에 심었다. 겨울 동안 집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튤립 구근을 심어 두고 동물들 먹이가 되지 않게 지켜봤을 것이다. 그녀 계획대로 봄이면 립이 꽃다발처럼 피었고, 작품 속에 그림으로 그려졌다. 정성을 다해 키워 그림으로 다시 살아나는 튤립 꽃은 그녀가 아끼는 꽃이기도 했다.


씨앗을 뿌리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잘 크는지 뿌리를 들출 수도 없고, 더 자라라고 줄기를 잡아당길 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육아는 좀 쉬운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듯이 화분에 물 주고 비료를 넣어준다. 화초들은 주인이 보지 않는 사이에 더 많이 자란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도 비슷하다.

그래서 놔두면 잘 크는 꽃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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