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얇아지니 아랫배가 신경 쓰였다. 가까운 공원에 걷기 좋은 트랙이 있어 남편과 함께 운동을 나갔다. 가능하면 매일 만보를 채우려고 노력 중이다.
공원 화단에 한두 송이 보이던 붓꽃이 여러 송이 피어 보기 좋았다. 꽃에 한눈 파느라 남편만 걷게 하고 잠시 꽃 사진을 찍으며 공원을 돌고 있었다.
빨간색으로 상하의를 맞춰 입은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눈이 마주치자 손에 든 여자는 꽃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사실 내 시선은 그 여자가 아니라 그녀 손에 들린 분홍색 꽃이었다. 얼핏 봤을 땐 글라디올러스 같았지만 그녀가 향기를 맡으며얼굴에대자 분홍낮달맞이꽃이라는 걸 알아챘다.하지만 꽃을 든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한 손에 잡은 꽃다발을 놓칠까 봐 그런지 힘을 꽉 쥐고 있어서 꽃잎은 긴장한 듯 뻗뻗해 보였다.여자의 손 뒤로 도라지처럼 하얗고 통통한 뿌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주 빠르게 머릿속은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하나, 꽃을 다시 심으려고 들고 가는 것일까? 잔뜩 힘을 주어 줄기를 잡고 빠른 걸음으로 꽃은 팔과 함께 흔들렸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꽃잎이 떨어질세라 줄기가 꺾일까 애지중지 힘을 빼고 아기를 안듯 할 것이다. 심지어 흙이 없는 뿌리를 들고 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그래도 옮겨심으려고 빨리 서두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둘, 뿌리가 흙도 없이 손질된걸 보니 달맞이 뿌리를 약으로 쓸려고 얻어가나? 그래도 곱게 키운 꽃을 통째 뽑아서 줄 주인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부터 한창 초가을까지 수없이 꽃을 피우는 부지런한 꽃이기 때문이다. 뿌리도 가을에 꽃이 지고 나면 뽑는 걸로 알고 있었다.
낮에 피는 분홍달맞이꽃 @songyiflower인스타그램
그때 머릿속을 스친 건 공원 옆 화단에 화사하게 핀 분홍낮달맞이였다. 설마 훔쳐가는걸 내가 본건가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훤한 시간에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아니겠지 싶었다.
마침 운동을 마친 남편이 오자 집으로 향했다. 공원을 벗어나는데 공중 화장실 근처에 그 여자가 있는 것 같았다.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이 여럿 보여서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확인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지나쳐가야 하는 길이니 그곳에 머물고 있다면 확인하고 싶었다.금세 화장실 근처로 갔지만 꽃을 든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화장실 앞 벤치 의자에 놓여있는 것이 있었다. 방금 전 그 여자 손에 들려있던 꽃다발이었다. 달맞이꽃, 냉이와 다른 야생초가 뒤섞인 꽃다발만 있고, 들고 온 사람은 온 데 간데없었다. 잠깐 봤을 땐 몰랐는데 급하게 뽑느라 다른 잡초도 함께 뽑힌 듯 보였다.
그냥 두고 갔나 싶었지만 없어진 것이 있었다. 도톰하게 부풀어있던 뿌리였다. 그 여자는 내 앞에서 꽃을 들어 향기를 맡았지만 덩그러니 뿌리만 들고 사라졌다. 순식간이었다. 분명 무리 지어 피운 곳에서 한 손으로 뽑을 수 있는 만큼을 급히 파고 나온 것이다. 뿌리를 온전히 들고 나오려면 줄기를 새차게 잡으며 땅을 팠을 것이다.
지나친 상상력인 줄 모르지만 뽑은 잡초처럼 버려진 분홍 달맞이꽃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함께 있던 남편이 말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었나 보네"
향기를 맡은 행동은 거짓이었다. 은은한 향기에 고운 분홍달맞이꽃을 그대로 두고 갔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