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토끼풀과 안개꽃 사이

by 무쌍

꽃을 찍고 틈틈이 책을 읽고, 알고 있는 것을 수다 떨듯 쓰는 일이 좋았다. 새로운 뭔가를 알게 되면 입이 근질거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아주 적이고 물건 수집처럼 좋아하는 걸 모아둔 사소한 일이지만 말이다. 매일 들고 다니던 노트가 다 채워지고 노트가 쌓이면, 어제보다 뚱뚱해진 뿌듯함을 눈으로 보는 듯했다. 지루하지도 않고 큰 비용이 들지 않는 찍고 읽고 쓰고를 멈출 수가 없다.

마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빈 공원에 앉아 무거운 장바구니 틈으로 커피를 꺼내 마셨다. 맛이 좋았다. 그때 알게 되었다. 요즘 부쩍 나에게 선물을 자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남편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 한두 시간 산책도 자주 나서고, 장 보러 갔다가 진열대 처음 보는 커피도 사 먹는다. 그런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은 것 같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 주변을 감도는 공기가 달라진 걸 눈치 못 챈 건가? 이사를 와서 그런가 환경이 달라져서 그러겠지 싶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꽃 이야기를 쓰려고 꽃 사진을 꺼냈는데 사진 속에 내가 들어가 핀다. 꽃을 보고 있지만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늘 나 자신이었다. 수레국화 뒤에서 수줍어하고, 백일홍처럼 오랫동안 피어 있던 것도 나였다. 꽃 이야기를 쓰면서 조심스럽게 내 안에 쌓인 것을, 그동안 부지런히 모아 온 감정을 쓰고 있었다.

혼자 있는 걸 꿈꾼 건 나의 수집품을 더 오래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의 호기심은 늘 밖으로 향해 있었다. 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가장 관심 없던 '나'에게 깊은 호기심이 들었다. 를 들춰내는 일에는 즐거움을 꼭 함께 느껴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냥 맹목적이었다.


오래전 노트에 옮겨놓은 글귀를 찾으려고 노트를 꺼냈다.

피천득 선생의 책 [수필]에는 어렵기만 한 수필 쓰기가 무엇인지 쓰여 있다. 그땐 읽는 사람으로 즐거웠던 터라 글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가만의 아우라를 감상하며 감탄했을 뿐이었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은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은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은 풀롯이나 클라이맥스는 필요하지 않다. 가도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 피천득 [수필] 중에서

언젠가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는지 눈에 띄는 문장들을 필사해두었다. 미래의 어느 날 이 글의 뜻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뭔가를 쓰는 사람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잠깐 동안 상상해보았었다. 노트에 필사된 문장은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작가의 진심은 글 안에서 쉼 쉬고 있었다. 글이 작품으로 게 되면 작가의 진심은 책에서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듯했다.


중랑천 수변공원 꽃씨가 뿌려진 곳에 약속을 지키듯 꽃이 피니 사람들은 확인을 하듯 모였다. 초록잎이 빽빽해지더니 하얀 안개꽃이 끝도 보이지 않게 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내문구에는 개양귀비 꽃씨를 심었다는데 안개꽃이 하늘에 뜬 구름만큼 피었다. 대신 흰 구름 물결 틈에 개양귀비 꽃이 붉은 점을 하나씩 찍는다. 꽃밭에 막 피어난 안개꽃은 깨끗한 솜이불이 되어 초록 잎을 뒤덮었다.

경계에 핀 토끼풀

걷다 보니 반대쪽 산책로 아스팔트 작은 틈에 핀 토끼풀꽃이 눈에 들어온다. 빈틈 사이로 핀 토끼풀꽃은 씨앗을 뿌리지 않았지만 자신이 뿌리내린 자리에서 폈다.

둘 사이에 양다리 걸친 듯 슬아슬한 감상을 하고 있었다. 흰색은 다른 색에 비해 눈에 띠지 않는다. 안개꽃은 주로 다른 꽃들을 받쳐주는 배경이 되는 꽃이고, 토끼풀은 클로버라는 이름을 잘 알지만 흰 사탕 꽃이 피는 걸 나치기 쉽다. 들꽃은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밟혀 사라지기도 쉽다.

중랑천 안개꽃길 @songyiflower 인스타그램

오늘 산책 길에 만난 두 꽃은 모두 새하얗게 파도치며 동시에 일렁였다. 바다 한가운데 들어선 듯 안개꽃 큰 파도와 토끼풀 작은 파도는 나를 뒤덮고 있었다. 친 파도는 멀리 떨어져 나와 지켜보던지, 써퍼처럼 파도를 타야 한다. 호주 본다이 비치에서 봤던 써퍼들처럼 파도 타듯 파도를 바라본다. 작고 향기로운 꽃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큰 파도처럼 힘이 세다는 걸 한순간 느낀다. 막대사탕처럼 달콤한 토끼풀꽃은 벌들이 벌써 알아보고 몰려들었다. 달콤한 꿀을 한입 나도 즐기고 싶어 졌다. 한동안 꽃밭에서 모든 것이 내 것인 듯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안개꽃 밭 옆에 핀 토끼풀꽃을 보며 내 인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어느 자리에서든 내가 느끼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자꾸 잊어버린다. 아직도 나는 피천득 선생이 말하는 수필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에 이해할 수 있다고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엇이 될지 몰라도 내일에 대한 기대는 중요하다. 판에 하얀 안개꽃이 다 지고 나면 또 다른 꽃이 파도가 되어 일렁일 걸 알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될지, 어떤 글을 쓸지 나도 알 수가 없다. 여러 계절을 더 보내고 얼마나 더 달라질지도 말이다. 수필이 무엇인지 알려고 글만 읽을 때와 수필을 써보려고 애쓰는 나 사이에서 좀 현기증이 난다.


둘 사이를 오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점점 다른 내가 되어간다. 변해버린 나를 길가에 핀 꽃처럼 숨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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