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낙서였다. 귀여운 글씨인데 학생일까? 벽돌 기둥에 하얀 펜으로 낙서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났다 - 공자
이 작은 낙서가 있는 기둥을 지날 때면 항상 시선이 갔다. 왠지 사는 것에만 신경 쓰는 나에게 죽음을 생각해봤는지 묻는 것 같았다. 글쓰기 강의 중엔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며 유서를 써보거나, 묘비명을 써보라는 미션은 종종 봤었지만 실제 죽음에 대해 써본 적은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나도 똑같이 무섭다. 죽음을 매 순간 떠올리며 상상하진 않지만 떨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애도의 시간은 버겁다. 그렇게 큰 슬픔이 오고 나서야 죽음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수록 죽음은 더 무거운 존재로 다가왔다. 병원 응급실을 가지 않아도 주변엔 늘 죽음과 삶이 공존하고 있다. 마스크 없이는 보이지 않는 전염병을 피할 수 없는 지금도 말이다.
한송이 겹루드베키아@songyiflower인스타그램 야생초 덤불 사이에 노란 꽃 한 송이가 피었다. 주변에 자라는 건 여뀌라는 야생초 같은데 꽃은 어느 틈에 싹이 터서 솟아났을까? 웬만해선 꽃에 손을 데지 않는 나지만 풀숲을 뒤적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꽃은 아무렇지 않게 피고 있었고, 관찰자로 식물을 보려는 마음을 지키고 싶었다. 대신 처음 보는 그 꽃이 무엇인지 찾아봤다. 이 꽃은 루드베키아였고 꽃잎이 풍성하게 피는 겹꽃 품종이었다. 주변엔 루드베키아가 많이 피어 있었는데 이런 겹꽃은 아니었다. 촘촘한 꽃잎이 새로운 꽃처럼 보였던 것이다.
금세 세송이가 피었다 그런데 화단 주변에 밀려드는 쓰레기가 신경 쓰였다. 쓰레기 무덤엔 계속 꽃이 피어났고 자꾸만 그곳에 핀 꽃이 보고 싶었다. 다른 루드베키아처럼 별 탈 없이 지내더니, 한 개였던 꽃송이가 많아졌다. 꽃이 피어가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좋은 일이 생겼던 것 같다. 주변은 난장판이지만 꽃은 아주 멋스럽기만 했다.
이야기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며 해피엔딩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갔어? 꽃은? 이게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지?
꽃을 찍은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고 그 길로 바로 전날도 걸었는데 꽃이 없다. 정확하게 꽃이 있는 자리에 자루들이 쌓여있다. 차라리 누군가 꽃을 잘라 가져 갔으면 좋으련만, 어쩌면 한살이를 마치고 완전히 시들어 씨앗을 만들었어도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꽃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을까?
누군가의 낙서처럼 죽기 위해 태어났으니 이런 광경을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잠시 멍해져 주변을 서성거렸다.
가끔 꽃을 찍는 나에게 허허 웃으며 "그걸 왜 찍어요? 라고 묻는다. 길가에 핀 꽃이 천연기념물이나 멸종위기 종과 같을 순 없겠지만 나에겐 삶이다. 싹이 돋고 꽃이 피는 찰나에 내가 사는 일상을 차곡차곡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살아가는 것에 감사함은 자연스럽게 쌓여갔다. 그렇게 자연에서 얻는 힘은 나를 건강하게 만든 듯 했다.
낙서처럼 죽기 위해 태어난 건 맞지만 살기 위해 태어난 것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죽은 꽃은 영정 사진처럼 남았다. 죽음에 대한 슬픔을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것도 애도라고 생각했다.
꽃을 따라다니며 내가 본 모든 순간에 죽음은 있었다. 그러나 죽음도 처음은 한송이 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