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뜨기 전 나무 숲을 걷는 일은 명상만큼 진정효과가 있다.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만든 수많은 선을 따라 들어서면, 밤새 나무 아래 건강해진 공기는 얼굴과 손, 그리고 온몸에 닿으며 한꺼번에 스며든다.
녹색으로 물들었던 숲은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단풍 물이 든 낙엽을 하나둘 떨어 뜨리며 나무가 꽃이 될 시간이 멀지 않았다. 어떤 색이 좋을까 시험을 하듯 조금 빨갛게 조금 노랗게 아니면 갈색으로 반점들을 찍은 잎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어떤 색으로 물들이면 좋을지 골라보라고 하는 듯했다. 한동안 여름과 가을이 섞인 숲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숲에 들어서니 지난밤 마음이 어지러웠던 걱정은 도망가고, 사그락 거리며 땅을 밟는 발소리가 편안한 멜로디처럼 느껴졌다. 이리저리 숲을 빙빙 돌다가, 땅 위로 올라온 리기다소나무 뿌리를 밟았더니 발바닥이 얼얼했다. 보기엔 잔뿌리였지만 땅 위에서 얼마나 단련이 된 것일까? 돌처럼 단단한 뿌리가 살아있는 나무의 힘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뿌리 주변엔 작은 이끼들이 붙어 있었데, 그들은 얼마나 오래 나무와 얽힌 인연일까?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이끼는 파릇했고, 살아있었다. 이끼를 보니 떠올랐다.
방금 숲으로 들어설 땐 분명 버리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내 심정을 알고 있는 듯 이파리 하나가 툭 떨어졌다. 떨어진 잎 아래에 버리고 싶었던 화난 마음을 숨겼다. 그리고 떨어진 잎처럼 내 몸에서 때어버렸다. 숲으로 온 이유도 아무도 모르게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서히 밝아오는 해가 숲의 열린 틈으로 이파리들을 비추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는 듯 눈부셨다.
숲이 밝아지니 나무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는 서 있지만 조금씩 기울어져 있는 듯 제각각이었다. 휘어지고 쓰러질 듯 기둥처럼 보이는 나무들 사이로 걸었다. 곧게 서 있는 나무는 없었다. 나무껍질은 울퉁불퉁했고, 날카롭게 긁힌 상처와 흉터처럼 남은 꺾인 가지 밑동이 보였다. 줄기는 하늘로 향해 있지만 모두 조금씩 뒤틀린 모습이었다. 나무가 말을 하지 않을 뿐 생존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참아내야 하는 것이 나에게만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금방 수용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빨리 잊어버리고 싶지만, 시간이 필요한 것을 서둘러 치울 수 없었다. 하지만 나무사이로 밝은 해를 보니 새로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돌아오는 길 멀리서 한눈에 봐도 꽃무리가 보였다. 집 근처에 그늘이 오래 머무는 화단이 있다. 항상 어둑하고 생기가 없이 늘 뾰족한 맥문동 잎이 무정하게 보였는데, 진한 보라색으로 뽀얗게 핀 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맥문동 꽃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밤새 멈추지 않고 걱정을 하는 동안 맥문동은 꽃을 피우며 끝없이 밤을 새웠나 보다.
그 꽃밭에서 어젯밤에 뒤틀린 것들이 모두 흐릿해져서 사라지는 듯했다. 가늘고 작은 몸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 순간에 나타는 것이었다.
누구든 자랄 시간이 필요하고, 성장할 길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침 해가 비추는 화단엔 모든 것이 준비된 듯 맥문동이 이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