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은 여름 꽃들은 시원한지 크게 웃으며 싱그럽다.
금계국이 떠난 풀숲엔 막대기를 꽂은 듯 긴 꽃대마다 꽃 봉오리가 생겼다. 좁고 뾰족한 잎 사이로 길게 내민 원추리는 군살 없이 날렵하고 가벼워 보였다. 작은 바람에 손짓하듯 원추리가 움직이며 여름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중랑천 산책을 나설 때마다 꽃이 피는지 살폈다. 능소화가 피기 시작하자 원추리도 하나둘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꽃대마다 큰 진딧물이 생겨서 꽃봉오리를 뒤덮어버렸다. 중랑천의 야생은 진딧물도 자연에 하나인 것처럼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아직 피지도 않은 꽃송이들이 견뎌줄지 걱정이 되었다.
걱정되는 마음도 금방 핀 꽃송이를 보자 잊어버렸다. 사진을 찍으며 다음번엔 만발해져 꽃다발처럼 핀 모습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랐다.
며칠 만에 안부가 궁금해져서 다시 찾은 꽃밭은 비어 있었다. 진딧물이 심해 보였는데 아무래도 원추리를 모두 잘라낸 모양이다. 잘린 줄기가 나무 그루터기처럼 길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다시 보고 싶었지만 늘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삶인가 보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것이 식물의 삶이다. 집에서 키우는 화초도 화분 안에서 살아간다. 중랑천 야생에서 만난 식물들은 더 운명적인 삶을 사는 듯 보인다. 자리를 잘 골라 씨앗을 남기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멀쩡한 꽃밭이 장마에 내린 폭우로 물이 넘쳐 잠기면 모조리 썩어 버리기도 했다.
조그만 서둘렀으면 한 번 더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발을 내딛고 있었지만 자꾸 뒤를 돌아보게 했다. 꽃은 기약도 없이 떠났지만 허전한 기분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더 힘차게 걸었다. 그리고 다른 꽃을 찾으며 중랑천의 여름을 즐겨보려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공터처럼 빈 화단이 있다. 겨울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산이 생겼다. 가지치기한 나뭇가지와 쓸어 담은 낙엽 포대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쓰레기들이 합세하며 산은 나무처럼 자랐다.
쓰레기 틈을 빠져나온 풀이 자라더니 반가운 겹꽃 원추리가 피었다. 방금 보지 못한 꽃이 찾아온 듯 탐스러운 겹꽃 원추리가 너무도 반가웠다
원추리가 핀 곳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자리였을 것이다. 매년 꽃을 피웠을 테니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누가 꽃을 일일이 기억해줄까? 겨울잠을 자는 식물들이 땅속에 있다는 걸 잊어버렸나 보다. 쓰레기 아래에 피지 못한 원추리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겨울이 오면 공터와 연결된 낡은 공원이 정비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여름을 맞을 때 원추리를 볼 수 있을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바뀔지 궁금해졌다.
원추리는 주변이 쓰레기 더미인데 큰 진딧물도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쓰레기 대신 꽃이 무리 지어 피었다면 좋았을 텐데, 섭섭한 마음을 잊기 위해 좀 더 걸었다. 걷는 동안 따가울 만큼 내리쬐는 태양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꽃은 여름이라며 분명히 알려주었다. 또 계절은 바뀌었다.
쓰레기 산에 핀 꽃은 걸어가는 내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 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며, 자신의 삶을 가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