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 수세미 꽃을 만났다. 쏟아지는 햇빛은 따갑고 땀은 쏟아졌지만 꽃을 보니 너무도 반가웠다. 양산을 펼친 듯 하늘을 향한 모습은 예전에 본 그대로였다. 이맘때 엄마 집에 피었던 수세미꽃이 떠올랐다.
산책길에 만난 수세미덩굴꽃@songyiflower인스타그램
방학이 되면 서울을 떠나 잠시 제주로 간다. 직장이 있는 엄마는 늘 바쁘셨고, 대신 아이들과 친정집을 빌려 여름휴가를 보냈다.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도시를 벗어난 기분을 누릴 수 있었다.
한 여름 마당엔 처음 보는 수세미 덩굴이 보기 좋게 자라고 있었다. 노란 꽃은 달덩이처럼 흐뭇한 기분이 들게 했다. 잘 자란 수세미 덩굴은 담장을 다 두를 정도로 울창했다. 꽃이 지면 오이처럼 긴 열매가 자랐다. 엄마는 동네 사람들이 오가며 구경하느라 집을 기웃거린다며 푸념 반 자랑 반을 하셨다.날마다 피는 수세미 꽃이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모른다. 꽃을 좋아하는 나는 수세미꽃을 보느라 육아의 고단함도 잊게 해 주었다.
제주에서 만난 수세미꽃@songyiflower인스타그램
엄마 집에서설거지를 하며 수세미 열매를 말린 진짜 수세미를 처음 썼다. 그동안 썼던 파는 수세미처럼 거칠지 않고 거품도 잘 났다. 맨손 설거지를 해도 손이 아프지 않았고, 적당히 까슬거려서 그릇이 잘 닦였다.
기름진 음식도 카레나 김치 물도 전혀 베이지 않고 원래 대로 돌아갔다. 일반 수세미는 음식찌꺼기가 남아 삶거나 소독을 했지만 천연수세미는 그럴 일이 없었다.
동네분이 엄마에게 마당에 키워보라고 말린 수세미를 몇 개 주셨다고 하셨다. 촘촘하게 작은 구멍이 난 수세미를 흔들어 보니 안엔 정말 씨앗이 들어 있었다. 그 안에 있던 씨앗들 중 몇 개가 엄마 집을 가득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말린 수세미가 너무 탐났다.
"엄마 나 이거 하나 주면 안 돼?"
"그건 갖고 가서 뭐하게?"
"수세미가 좋아서 나도 써보고 싶네. 근데 엄마 마당에 수세미 많이 열리면 나한테 몇 개 줄 거야?"
"글쎄 하도 동네 소문이 나고 달라는 사람이 많아서 남으려나."
대답은 시원치 않아도 내 몫의 수세미는 남겨두시겠지 기대했다. 얼핏 세어도 열매는 50개가 넘게 자라고 있었다. 저렇게 많은데 무슨 걱정이람. 아이들과 마당에 나갈 때마다 수세미 열매를 세어보며 숫자 놀이도 재미났다.
수세미는 내 살림 친구가 되었다. 집안일 중에 가장 미루는 설거지를 수세미가 많이 도와줬다. 수세미를 만질 때마다 노란 수세미 꽃이 파란 하늘을 날아갈 듯 피었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부터 공장에서 만든 수세미가 아닌 진짜 수세미로 설거지를 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수세미는 자주 바꿔줘야 했지만 천연 그대로인 수세미는 완전히 닳아 작아질 때까지 썼다.
수세미는 내 살림 친구다
엄마의 수세미 덩굴은 추석을 지나 열매를 수확하셨다. 그런데 내 몫으로 남은 수세미는 없었다. 그 많은 수세미는 어디로 간 건지 남은 게 없으시다고 했다. 달라는 사람이 많았다며 내게 젊은애가 뭐 그런 걸 쓰냐고 하셨다. 이제 남은 수세미가 작아지면 어디서 구한담? 엄마는 다시는 수세미 덩굴을 안 키우신다니 수세미를 구할 곳을 찾아야겠다. 아무래도 수세미는 나만의 취향이었나 보다. 지금 어딘가에선 달처럼 노란 수세미꽃이 피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