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버들의 부고(訃告)

사라진 나무를 기억하다

by 무쌍



지난겨울 친구가 죽었다. 그의 죽음은 다소 갑작스러웠다. 4년 전쯤부터 밑동과 나무줄기가 상처로 갈라져 치료를 받아 걱정은 되었지만, 지난여름 물난리에도 거뜬하게 넘겼기에 희망적이었다. 안타깝지만, 중랑천 산책로에서 가장 큰 나무 수양버들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다.


수변공원(水邊公園)에 메밀꽃과 코스모스가 만개하면서 사람들은 모이기 시작했다. 꽃이 피어있는 동안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뒤엉켜 중랑천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나도 그 속에 섞여 꽃 사진을 찍느라 매일 찾았지만, 코스모스가 시들해질 때가 되어서야 수양버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죽음은 말없이, 예고도 없이 떠나는 이별이다. 허망하지만 그동안 찍어둔 사진으로나마 기억해야 했다. 나무가 사라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미안했고, 어떻게 된 일인지 구청에 가서 묻고 싶었다. 유명한 사람이 죽으면 부고가 쓰이고 알려지지만, 중랑천에 나무가 죽은 건 아무도 모른다. 작은 야생초가 꽃을 피우는 것도 잘 찾아내는 내가 10미터가 넘는 나무가 사라진 걸 몰랐다. 나조차 친구라고 생각하며 산책로에서 반갑게 인사하고 지냈지만, 봄이 되도록 눈치채지 못했다.
아름답게 보이던 코스모스 꽃이 시들어가니, 사람들도 찾지 않았다. 잠깐 일렁거리던 꽃밭을 만들자고, 그 큰 나무를 베어버린 사람들의 욕심은 씁쓸하기만 했다. 마치 코스모스 언덕을 만드느라, 수양버들을 잡초 취급해 뽑아 버린 것 같았다.


나는 그 뒤로 수양버들이 사라진 이유를 찾아보려 했다. 문득, 지난겨울 수변도로에 세워져 있던 큰 트럭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중랑천으로 산책을 나왔다. 산책을 나설 때는 한 시간 이상 천천히 걸을 계획이었지만, 어서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 멀리 산책로 끝에 엄청난 크기의 트럭에는 나무가 실어져 있었다. 나무는 뽀얀 담갈색 속살이 드러나 있었고, 트럭 가운데 자리를 차지해 꽤 큰 나무가 실렸구나 싶었다. 저 트럭은 목재를 싣고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런데 트럭 옆에 작업하는 사람들이 뭔가 답답한 듯 빙글빙글 주변을 돌고 있었다. 삽을 든 서너 명이 그루터기를 뽑아내느라 낑낑대고 있었다. 눈도, 비도 자주 오지 않아 땅은 마르고 거칠었다. 삽은 쉽게 흙을 뚫지 못했다. 그루터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도 끝을 볼 생각인지 포기하지 않을 듯했다. 예전부터 죽은 수양버들이 두 그루 있었는데, 아무래도 정리 중인가 싶었다. 사람들이 그루터기와 씨름하는 동안 나는 서둘러 산책로를 벗어났다. 그때까지도 트럭에 있던 나무가 그 친구인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차가운 바람을 어서 벗어날 생각뿐이었다.


그때 수양버들 친구는 잘린 채 떠나갔다. 해가 넘어가면 처음 만난 지 곧, 십 년이 되는 오래된 친구였다. 수양버들은 중랑천 가까이에서 해마다 힘차게 자라고 있었다. 봄에 가장 먼저 연둣빛 작은 잎사귀가 돋아나고 곧, 버들 꽃도 폈다. 수양버들은 아래로 길게 늘어지는 수형이 특징인데, 여름마다 줄기가 길어지면 단정하게 단발되어 있었다. 여름 장마로 물에 자주 잠기니 관리를 해주어야 했을 것이다. 수양버들 줄기가 무성하게 잘 자란 해에는 짧게 커트가 됐고, 보통은 사람이 닿지 않을 정도로 다듬어졌다.


거센 바람도 가는 바람도 수양버들 가지는 유연하게 움직인다. 한꺼번에 같은 방향을 가다가도 한 가닥씩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무 아래에 서있으면 내 머리를 쓰다듬듯 줄기가 닿는다. 할머니 손이 아이 머리를 쓰다듬듯 가볍고 다정한 손길로 나를 안심시킨다. 수양버들은 언제나 부드럽고 가볍다. 바람 불어도 가지가 서로 엉키지 않는다. 거친 바람에도 나뭇가지가 부딪치는 소리도 부드럽게 듣기 좋기만 하다. 나무 아래 들어서면 커튼 뒤에 숨은 듯 나무와 시간을 갖는다. 뻗어 올라간 나뭇가지는 셀 수 없이 많고, 가지는 아래로 늘어져서 빙글빙글 엇갈려 나뭇잎이 달려있다. 여러 사람들이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각자 나무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듯 안식처가 되었다.


꽃이 사라진 겨울은 지루하고 푸릇푸릇 한 잎사귀들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꽃을 찾는 카메라도 꺼지고, 마음은 가라앉아 홀로 시간을 갖게 된다. 수양버들도 잎사귀를 다 떨구고, 셀 수 없이 많은 가느다란 줄기가 늘어져 마치 중랑천에 앉아 낚시를 즐기는 듯 보였다. 긴 산책로를 걷다 보면 잠시 쉬고 싶어 지는데, 가장 좋은 곳이 수양버들 아래였다. 그때마다 유일하게 마주 보고 말을 걸어 주는 것은 수양버들이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몇 년간 찍어둔 수양버들 사진이다.
영정사진을 보듯 나무를 본다. 사진을 열어볼 때마다 나무는 말을 건넨다. ‘잘 지내고 있니?’ 그동안 애타게 찾았던 안식처가 이미 마음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그와 함께 한 수년간 나무는 늘 나에게 ‘언제나 몸이 유연해야 해!’라고 했다. 경직된 상태에서는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나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채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양버들의 유연함은 나뭇가지를 늘어뜨린 자세도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거센 바람이 불 때도 수양버들의 나뭇가지는 거칠게 움직이지 않는다. 크게 요동을 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다. 수양버들의 몸은 안식처가 되고, 모든 것을 부드럽게 연결한다. 그런 수양버들이 언제나 부럽기만 했다.
사진을 보면 한들거리는 수양버들 가지를 다시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몸은 유연해지고, 표정도 부드러워진다. 내가 요즘 일이 잘 안 풀린다고 짜증 섞인 모습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함부로 한 것은 아닌지, 조급함에 일을 그르친 적은 없는지 떠올려본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유연하게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수양버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

중랑천 수양버들 2018


나는 여전히 수변공원으로 산책을 간다. 지금은 나무 그늘 아래 만들어진 작은 쉼터가 비석처럼 남았다. 비석 앞에 서서 눈을 감으니, 수양버들 나무가 그리워진다. 안식처로 남았던 큰 나무는 베어져 사라졌다. 목재가 된 나무는 또 다른 쓰임새로 고마운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나도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되겠지. 그래도 수양버들 친구가 오랫동안 남아 노거수(老巨樹)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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