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꽃이 되면 가을 제비꽃이 핀다

가을 제비꽃

by 무쌍

11월이 시작되면 나무가 꽃이 된다. 허리를 숙이고 발아래 꽃을 찾아 사진을 찍는 것이 익숙하지만, 가을은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쳐든 채 나무 구경에 빠진다. 꽃보다 더 빨리 물들고 더 빨리 사라져 버린다. 도시에 가로수들 가운데 은행나무잎과 청단풍, 플라타너스 나무는 완벽한 꽃을 만들어 낸다.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희곡에서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라고 썼다. 11월에 느끼는 가을은 그가 쓴 표현이 딱 들어 맞는다.

가로수 2020.11.14

차디찬 겨울이 오기 전에 맛보는 11월은 잊었던걸 되살려 낸다. 짧은 기간이지만 하다만 계획들을 다시 소환해서 진행해 나가도록 재촉한다. 시작은 좋아하고 마무리가 엉성한 나에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을 찾으며 글을 쓰겠다는 계획은 가을이 되니 발행글수가 참 소박하다.


가을은 태양이 사라지면 차가운 바람이 분다. 문득 가을 제비꽃이 보고 싶어 졌다.

살짝 차가운 초봄이 된 잠깐의 시간에 나는 예민하게 제비꽃을 찾아 나선다. 제비꽃은 초봄 풍경처럼 봉화산에 피어 있었다. 야생화들은 계절의 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틈을 노리는 것이 아닐까? 여름 더위에 사라졌던 봄 꽃들이 초봄처럼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는 것 같다.


내가 글을 쓰기 위해서 혼자 있는 틈을 찾는 것처럼, 야생화들도 벼르며 준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고맙기만 하다.

제비꽃 2020.11.14
제비꽃 2020.11.14

가을 제비꽃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초봄에 핀 제비꽃 흔적을 찾으면 된다. 제비꽃은 꽃을 피우지 않아도 씨앗을 만들기 때문에 가을에 피는 꽃은 봄처럼 풍성하게 달리진 않는다. 하지만 완전히 영하로 떨어지는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계속 피어난다. 가을이 주는 초봄 같은 시간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꽃 사진 수집을 하게 한다. 마치 봄에 보지 못한 제비꽃을 다시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기분이다. 봄에 제비꽃이 피었던 자리를 찾는건 수첩에 메모하는 것보다 해가 길게 내리쬐는 양지바른 곳을 찾는 것이 확률이 높다. 매년 반복하면 머릿속엔 제비꽃 지도가 그려진다. 물론 사라지는 곳들도 많고, 시기를 놓쳐서 꽃이 지고 난 후 찾아가기도 한다. 제비꽃이 필 때는 조바심이 많아지고 욕심이 끝도 없어진다.

언제나 제비꽃은 나의 기분을 붕하고 하늘로 쏘아 올린다.

민들레가 동면하려고 납작 땅에 붙었는데 노란 꽃을 피웠다. 꽃은 더 추워지기전에 금세 지고 동그랗고 섬세한 홀씨 포자를 만들것이다.

민들레 2020.11.14
애기똥풀 2020.11.14


낙엽 이불을 덮은 애기똥풀꽃도 활짝 피었다. 얇고 노란 꽃잎과 선명한 녹색 이파리는 봄의 싱그러움을 느끼게 한다.


가을은 봄처럼 새로운 시작은 아니지만 힘을 좀 빼고 한 번 더 시도하게 하는 계절이다. 기회를 다시 얻었지만 봄처럼 찬란하지 않고, 담담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어쩜 나도 이력서를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주부라는 두 번째 이력서를 쓰려고 한다.


이력서를 쓰고 싶은데 둘째를 낳으면서 퇴사한 직장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아이들이 자라고 가방을 메고 나서는 모습을 보니, 다시 월급 통장이 갖고 싶고, 출근이 하고 싶어 졌다.

두 곳의 직장에서 쌓았던 경력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대신에 다른 경력이 쌓였다.


두 번의 임신기간

두 번의 수술

두 번의 수유기간

두 아이의 엄마

그리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은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경력사항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앞으로 쓸 이력서는 면접을 위한 제출용이 아니라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설명서와 비슷하다.


개인적인 일들을 쓰기엔 일기장이 적합하지만 누군가가 읽게 되는 글을 쓰고 싶다. 경력증명서엔 레퍼런스라고 해서 그동안 해왔던 일들은 구체적으로 결과 중심으로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주부의 일은 매일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그리고 반복된다. 냉장고와 싱크대에서 식탁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하루 절반을 수도없이 오간다. 때때로 설거지를 도와주는 파트너의 고마움도 있지만 담당자는 나다.


주부로 경력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가족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일다. 아마도 엄마들이라면 아래의 항목을 모두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다른 메뉴로 식단을 차린다. 같은 음식재료로 어른용 아이용으로 구분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 국과 밥, 반찬을 모두 한꺼번에 만들어 내면서 20분 이면 식사 준비를 마친다.


나의 경우를 비추어 보면, 살림은 처음부터 소질이 있어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행위로 인해 쌓이는 결과물이다. 주부로 몇 년 차가 되었는지가 인정이 되는 것은 바로 반복의 힘이다. 불꽃에 구워내는 건 끝까지 잘 익혀야 먹을 수 있고, 양념장은 비율이 맞아야 쓸모가 있다. 실수와 연습은 같이 반복되고 가족들은 점점 내가 만든 음식에 익숙해진다. 반복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글을 잘 쓰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글을 좋아하는 마음이 글을 쓰게 하고 있는 사람이다. 2020년 2월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다. 운이 좋아 작가 신청이 되고 브런치 북을 하나 만들었다. 매일 글을 올리지는 못하지만 나는 반복의 힘을 믿어 보기로 했다. 11월 잠시 느껴지는 봄 꽃들이 주는 시작의 기운을 빌려서 처음 브런치 작가 신청이 수락되었던 때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두 번째 봄인 가을은 요란하지 않고 어깨 힘을 뺀 채 더 오래도록 글을 쓰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지금 나는 직장에서 월급을 받으려고 쓰는 이력서는 아니지만, 항상 꽃과 나무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나만의 인생 설명서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수양버들의 부고(訃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