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어디일까? 새벽에 일어났지만 다시 잠들지 못했다. 흐린 날일수록 마음은 바닥까지 가라앉아 무거워지는데, 문득 나팔꽃이 보고 싶었다. 꼬리를 무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 것처럼, 나팔꽃도 끝없이 밤을 새우며 피어 있을 듯했다.
옆 동 화단엔 백일홍, 분꽃, 과꽃, 구절초, 나팔꽃과 박하 꽃이 한창이다. 저녁 일과를 마치고 쓰레기를 들고 나오면 분홍 나팔꽃은 지고 없지만, 비슷하게 생긴 나팔 모양 분꽃이 활짝 피어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누가 이렇게 화단을 아기자기하게 가꾸는 걸까?
여름엔 원추리가 만발했는데, 지금은 가을 구절초가 피기 시작했다. 꽃은 계절에 맞게 물이 흐르듯 바뀌어 갔다. 원래 사철나무만 있는 작은 화단인데, 누가 이렇게 많은 꽃을 심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분홍나팔꽃과 박하꽃@songyiflower인스타그램
새벽에 나가길 잘했나 보다. 활짝 핀 분홍 나팔꽃이 날 기다려줬다. 막 피어난 나팔꽃을 보니 싱그러운 기운을 모두 가져가고 싶을 정도로 에너지가 느껴졌다.
"꽃이 예뻐요?"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어느새 내 옆으로 오신 할머니가 내가 뭘 찍는지 궁금해하셨다. 박하 꽃과 나팔꽃이 한데 핀 모습이 예쁘다고 했다.
할머니는 웃으시며 모두 꽃씨를 사다가 심은 거라고 하셨다. 드디어 궁금해하던 화단 주인을 만났다. 말없이 할머니는 박하잎을 하나 뜯어서 살짝 비비더니 주셨다.
" 마스크 안 내려도 냄새가 날 거예요. 한번 맡아봐요."
박하잎을 건네는 손은 완벽한 초록 손이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박하잎이 있었지만, 손과 잎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초록색이었다. 박하잎은 정말 강한 향이었다. 평소에 맡던 향기보다 더 진하게 마스크를 안으로 들어왔다.
할머니는 꽃을 예쁘게 봐주니 고맙다고 하셨다. 나팔꽃이 더 예뻤는데 요즘 시들해서 아쉽다며, 대신 분꽃 향을 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분꽃이 지금 저렇게 피어있지만, 지금은 향이 없어요. 진짜 향은 밤에 나요. 시간 될 때 한번 와서 봐요."
요새 내가 잠을 설치는 걸 할머니는 아셨을까? 박하가 불면증에 좋은 효능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막 뜯은 신선한 박하향을 맡게 해 주셨다. 오전 내내 잎을 들고 다니며 향기를 맡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바짝 말라버렸다.
물에 넣어 둘걸 후회했지만, 향기는 머릿속에 저장이 되었나 보다. 여전히 향기가 맡아졌다.
내일은 나팔꽃을 보러 못 갈듯하다. 할머니가 주신 박하 덕분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할머니의 박하잎은 의사에게 처방을 받은 약처럼 벌써 내 불면증을 낫게 해 준 듯했다. 박하향이 잊혀지기 전에 분꽃향을 맡으러 밤산책을 나서야 겠다. 마음이 아플 때마다 찾아갈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난 듯 든든해졌다.
상처는 가까운 사람에게 받지만, 위로는오히려 낯선 사람에게 받게 되는 듯하다. 처음 만난 초록 손 할머니에게 받은 박하잎은 마음도 함께 어루만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