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시간은 똑같을 수 없다
달맞이꽃과 로제트
산책로는 어딘지 모르게 깔끔해졌다. 얼마 전 풀을 모두 베어낸 자리에 야생초가 같은 크기로 새로 돋았다. 봄인 듯 초록잎은 싱그러운 분위기가 났고, 새벽이지만 따뜻한 공기가 맞아 주었다. 길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걷는 동안 가지런히 자란 야생초는 잘 정돈된 정원을 걷는 기분이 들게 했다.
계절의 시곗바늘은 어디쯤 돌아가고 있을까? 어둠이 더 깊어지면 숨었던 겨울이 나타날 것이다. 대지는 얼마 뒤 고요하게 잠들 시간을 앞두고 있다. 꽃이 진 자리에 여문 씨앗을 땅에 묻고, 힘을 잃은 잎을 모조리 흙 위로 쏟아낼 것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시간이 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듯, 멀리 가로수는 꽃처럼 노랗고 주황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중랑천 물가엔 사람 손이 미치지 않은 야생이 남아 있었다. 초록잎이었던 여뀌는 가장자리부터 발그레 수줍은 얼굴이 되었다. 단풍 물이든 잎이 붉은 장미 꽃잎처럼 보이고, 다닥다닥 분홍색 알갱이가 붙은 모양의 꽃은 꽃잎 안에 있는 수술이 길게 나온 것처럼 보였다.
살살 흔들리는 코스모스는 여기저기 깃발을 꽂아 놓은 듯 가을 표지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초록잎들은 그동안 겉옷처럼 입었던 싱그러운 초록을 벗어버리고, 타고난 본연의 색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가을만큼은 나무가 주인공이 된다. 순리대로 계절이 가고 있음은 식물들의 모습으로 알 수 있다.
꽃이 피는 봄은 아이들의 운동회처럼 와글와글 팡팡 터지듯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를 냈다. 뜨거운 여름을 보낸 자연은 가을이 되면 묵직하고 확실한 완성품을 만들어 전시회를 연다. 인생의 중반을 넘기면 인생의 깊이를 깨닫는 시간이 반드시 주어지듯 이 가을이 주는 풍경은 소중했다.
아직 가을이지만, 달맞이꽃은 겨울 채비를 마친 듯 여기저기 로제트로 변신했다. 길게 솟아올랐던 줄기는 땅속으로 깊게 파고 들어갔고, 줄기 따라 달렸던 잎은 겹겹이 쌓아 올린 듯 보였다. 겨울 내내 이파리들은 겹겹이 이불이 되어 뿌리를 덮어줄 것이다. 냉정하고 차가운 겨울을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달맞이꽃 월동 모습 2021.10.30 중랑천 ( 로제트식물: 극도로 짧아진 줄기에 잎이 사방으로 나와 납짝한 장미꽃 모양의 외관을 이루는 식물을 말한다) 벌써 월동준비 마친 달맞이꽃은 몇 가닥 브릿지를 한 머리처럼 붉은색으로 치장하며 여유를 부리는 듯 보였다. 그런데 여유를 부리는 건 또 있었다. 달맞이꽃 로제트 옆에 노랗게 핀 달맞이꽃이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다. 산책로에 제초작업을 한지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 그 짧은 시간에 뻗어 올라간 꽃대엔 보름달처럼 커다란 꽃이 피었다. 꽃송이가 반대편에 핀 코스모스보다도 더 커 보였다. 그동안 봤던 달맞이 꽃 중에 가장 큰 송이였다. 모두가 겨울을 보낼 준비를 마쳤는데, 기세 등등하게 최고의 시간을 누리는 듯 보였다. 어떤 것이 이르고 어떤 것이 느린 것인지 헷갈렸다.
달맞이 꽃(2021.10.30 중랑천)@songyiflower인스타그램 지금 한철을 즐기는 코스모스에게 물어볼까 싶었지만, 코스모스도 자신만 바라봐 달라고 말하는 듯 고개를 내밀었다. 각양각색의 얼굴을 한 사람들처럼 자연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늦게 꽃 핀 달맞이꽃도, 가을이 남았는데 벌써 월동준비를 한 달맞이꽃도 틀리지 않았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시간은 똑같을 수 없다.